정대호 시인이 ‘사람의 문학’ 과월호가 꼽힌 서가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강성만 선임기자 |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희생자 유가족들의 목소리를 심층 인터뷰로 전한 글이죠. 대구시는 애초 유가족에게 희생자 추모공간 조성과 추모 기념탑 건립 등을 약속했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어요. 지방자치 시대이지만 이 지역 단체장들은 여전히 국민을 통치 대상으로만 봐요. 민중의 문제 제기를 시비 건다고만 생각하고 묵살하기 일쑤이죠.”
지난해 창간 30년을 맞은 대구 지역 종합문예지 ‘사람의 문학’ 발행인 정대호(67) 시인에게 기억에 남는 잡지 게재 글을 하나 꼽아달라고 하자 나온 말이다. 그는 “지역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기록하는 게 지역 잡지의 숙명”이라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도 대구 쪽 사람들이 뭘 원하는지 찾아 그 문제의식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지역 민중들과 소통하는 노력을 계속할 겁니다.”
1994년 ‘사람의 문학’ 출발에는 앞서 2년 전 대구에서 태동한 시 전문계간지 ‘시와반시’가 촉매제 노릇을 했다. 순수문학 성향인 ‘시와반시’와 균형을 맞출 리얼리즘 문학 발표의 장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1983년 결성된 ‘분단시대’ 동인 주축으로 첫발을 뗀 ‘사람의 문학’은 시와 소설은 물론 산문과 르포, 기록문학 등 다양한 형태의 글로 지역 이야기를 담아왔다.
정 시인을 지난 25일 대구역 근처 사무실에서 만났다. 1984년 분단시대 동인으로 처음 시를 발표한 그는 ‘가끔은 길이 없어도 가야 할 때가 있다’(2020, 푸른사상) 등 지금껏 모두 6권의 시집을 냈다.
‘사람의 문학’ |
‘사람의 문학’ 올 봄호에는 ‘10월항쟁 민간인 희생자 유족회’ 박종경 회원이 지난 생애를 돌아보는 구술 인터뷰가 실렸다. 1946년 10월1일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한 10월항쟁은 미 군정기 최초의 대규모 민중항쟁이다. 유족회 이사이기도 한 정 시인은 2013년 처음 열린 ‘10월 문학제’를 2015년부터 위원장으로 이끌고 있다. 대구 이육사 기념사업회 상임대표도 맡고 있다.
매호 700부 찍는 잡지 발간에는 정 시인 사재가 적잖게 들어간다. 2013년까진 그가 입시학원 국어 강사를 하며 받은 수입이, 그 뒤론 작은 사업체 운영 수입이 적자를 감당하는 주요 재원이다.
경북 청송에서 태어나 유신 시절인 1977년 경북대에 입학한 정 시인은 대학 4학년 때 구속에 이어 학교에서도 제적당하는 시련을 겪었다. 그는 광주항쟁 한 달 뒤인 1980년 6월 그믐밤 대학 선후배들과 함께 만든 5·18 진실을 알리는 유인물 ‘알려드립니다’를 대구 동쪽 만촌동과 효목동 일대 주택에 뿌렸다. 이 일로 석달 뒤 구속되어 1심에서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났다. 그는 석방 뒤에도 4~5년 대구에서 경북대생 관련 시국 사건이 터질 때마다 경찰에 끌려가 폭행을 당하곤 했단다.
“배후조종 혐의였죠. 제가 학부 3학년이던 1979년에 학내 문학 동아리인 복현문우회 회장을 했는데요. 당시 문우회 출신들이 학내 반정부 시위에 많이 참여했어요. 1980년대 초반 시국 사건으로 경북대에서 나온 구속자 36명 중 9명이 문우회 회원이었죠. 제가 대학에서 잘리고 문우회 후배들과도 교류가 잦으니 경찰이 사건이 터질 때마다 저를 끌고 갔죠.”
그의 시 ‘내 인생은 블랙리스트였다’에는 1980년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구속된 이후 시인이 겪은 불이익이 기술되어 있다. 1985년 경북대 대학원 시험에서 떨어지고 그해 대구의 입시학원 강사 채용도 보류된 데는 대구 정보경찰의 블랙리스트에 그의 이름이 올라서라는 것이다. “1990년 윤석양 당시 보안사 이병이 폭로한 민간인 사찰 명단에도 제 이름이 있더군요.”
학원강사 등 수입 써가며 32년째 내
10월항쟁과 해방 직후 대구학생운동
지하철 참사 등 지역의 이야기 기록
“앞으론 6·25 전후 이야기 기록할 터
대구·경북 보수는 생존을 위한 보수”
80년 6월 대구에서 광주항쟁 알리다
구속된 뒤 경북대에서 제적 고초도
2015년부터 ‘10월 문학제’ 위원장
왜 대구·경북은 강한 보수의 논리로 두껍게 무장하게 되었을까? 그가 잡지를 만들면서 묻고 답을 찾으려 한 주제이다. 10월항쟁 구술 증언과 대구 지역 통일·민주화운동의 산증인인 강창덕(1927~2021) 선생 구술 등을 잡지에 잇달아 실은 것도 그 때문이다. “강 선생 구술을 통해 해방 직후 대구 지역 중고생들이 언더(지하)그룹 독서회에서 대학생들 지도를 받아 책을 읽고 토론하고 유인물도 만들면서 당시 민족적 과제인 단일국가 수립 의지를 다지고 실천 활동도 펼친 점을 새로 알 수 있었죠.” 그는 “10월항쟁 정리가 마무리된 뒤에는 6·25 전후 대구에서 일어난 일을 잡지에 기록할 생각”이라고 했다.
그는 대구·경북 지역의 보수 성향을 “생존을 위한 보수”라고 규정했다. “최태육 현대사 연구자에 따르면 해방 직후 경상도 지역엔 면 단위로 방첩대(현 기무사)가 있었어요. 다른 지역은 대개 3개 군에 하나였죠. 그만큼 이 지역은 사상범으로 걸린 사람이 많았어요. 보도연맹 사건 등으로 학살도 많았고 월북도 많이 했습니다. 어떤 문중은 회의를 해서 ‘너는 월북하라’고 권하기도 했죠. 누가 빨갱이라고 핏대를 세운 사람들 보면 다 몇촌 이내에 북으로 가거나 학살당한 피해자들이 있어요.” 설명이 이어졌다. “지금 60대나 70대는 신원조회를 거쳐 취직한 세대인데요. 여기는 신원조회를 걱정하지 않고 취직할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어요. 신원조회를 통과하려면 당시 3급 이상 공무원 보증이 필요했어요. 보증인은 경찰서장이 많았는데요. 서장 앞에 가서 뭐라고 하겠어요. 보수에서 절대 다른 데로 눈 돌리지 않겠다고 마음속 맹세를 하지 않았겠어요. 10월항쟁 피해자 유족회원 중에도 극우 성향이 많습니다.”
고대사 공부를 꿈꾸며 대학에 들어간 그는 신입생 시절 복현문우회에 가입하고 시를 만났다. “문우회 선배들이 신입생을 모집하는데 작은 책상 하나만 있고 너무 초라하더군요. 그게 좋아 보여 가입했어요. 2학년 때 권오운 시인의 풍자적이면서 현실 비판적인 시 ‘원님전상서’를 잡지에서 보고 나도 한번 그런 시를 써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정대호 시인이 인터뷰 뒤 사진을 찍고 있다. 강성만 선임기자 |
그는 대학 스승인 김춘수 시인도 자신의 문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했다. “김 시인이 수업 중 시인은 온몸으로 바람을 맞고 가는 사람이란 말을 많이 했어요. 정작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으셨지만요. 하지만 그 말은 나중에 (저로 하여금) 작가로 산다는 것 또 글을 쓴다는 게 뭔지 자꾸 생각나게 하더군요. 시인으로 살려면 현실의 고난을 피해선 안 된다는 의미겠지요.”
‘사람의 문학’이 배출한 문인에 대해 궁금해하자 그는 “우리 잡지는 신인 등단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밝힌 뒤 만 54살에 ‘사람의 문학’으로 등단한 류근삼(1940~2019) 시인 이야기를 꺼냈다. “평생 통일운동을 하신 분이죠. 민담 시를 잘 쓰셨어요. 일상의 삶을 웃음으로 잘 풀어내셨죠. 94년 등단 뒤 ‘글마가 절마가’ 등 여러 권의 시집을 내셨습니다.”
그는 청마 유치환 연구로 1996년 경북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청마의 시를 아나키즘(무정부주의) 관점에서 들여다 본 논문이다. 스승 김춘수 시인에 대한 글도 언젠가 쓸 생각이란다. “2002년 김 시인에게 제가 선생님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전두환 정권에 참여해 욕을 많이 먹지만 김 시인은 일제 때 무정부주의 운동을 하다 구속되었고 해방 직후에도 윤이상 유치환 등과 여운형 노선 인민위원회 계열로 추정되는 통영문화협회 활동을 했어요. 이 때문에 한국전쟁 때 도망 다니기도 하셨죠. 유신 시절엔 경북대 민주 교수 3인방으로도 불리셨죠.”
지역 문학판에서 ‘사람의 문학’의 위상에 대해 궁금해하자 그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며 말을 이었다. “대구 시단에 복현문우회 출신들도 많고요. 제 삶의 원칙도 그렇지만 잡지 역시 편 가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생각이 달라도 글이 좋으면 게재합니다. 이념적 갈등을 표나게 하지 않고 우리 생각을 내세우려고 하지요.”
그는 지금도 활발하게 시를 쓴다. 왜 시일까? “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죠. 제 성격이 내성적이고 활동적이지 않아요. 그래서 제 생각을 들어줄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저와 다른 생각을 많이 할 때 시를 쓰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가장 애정하는 시가 뭐냐 하자 그는 이육사의 ‘절정’과 ‘청포도’ 그리고 유치환의 ‘생명의 서’를 들었다. “이육사 청포도는 미래의 우리나라가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시입니다. 우리나라가 물질과 정신적 풍요가 함께 이뤄지는 1년 중 7월과 같기를 바라고 사람들은 마음껏 이상을 꿈꾸고 지위가 낮은 사람도 풍요를 함께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바람이 담겼습니다. ‘생명의 서’에서 생명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노력입니다. 돈이나 사회적 명예에 유혹되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사는 세상에 대한 성찰이 담긴 시입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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