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헤이그에서 25일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 등 회원국 정상들과 대표들이 본회의에 앞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AP 연합뉴스 |
길윤형 | 논설위원
“지난해 7월이었습니다. 대통령이 되시기 전 저격을 당하셨을 때 겁먹지 않고, 일어나 주먹을 치켜 드셨습니다. 그 순간을 찍은 사진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뒤로 푸른 하늘이 펼쳐지고, 성조기가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마 역사에 남을 사진이 될 것입니다. 그때 대통령 각하께선 ‘나는 이렇게 신으로부터 선택받았다’, ‘반드시 대통령에 당선돼 미국을 다시 위대한 국가로 만들겠다’고 확신하셨을 게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2월7일(현지시각) 오전 11시55분. 미국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엄청난 ‘쪼찡 멘트’(아부성 칭찬)를 쏟아내는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를 바라보며, 만감이 교차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한국 언론계에서 자주 쓰이는 은어인 ‘쪼찡’은 한자 ‘제등’(提灯)을 일본식 발음으로 읽은 것이다. 하인이 어두운 밤 앞서 걸으며 등으로 주인의 앞길을 비추듯 누군가의 비위를 맞추거나 아부를 떤다, 혹은 그런 기사를 쓴다는 의미로 쓰인다.
낯부끄러운 접대 멘트를 입에 담은 이시바 총리가 누구던가.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절대 권력을 확립했던 2010년대 일본 정계에서 단기필마의 외로운 도전을 마다하지 않았던 반골의 승부사이자, ‘집단적 자위권’에 대해 단독 저서를 출간한 적이 있는 자존심 강한 안보 전문가이며, 그래서 인간 관계에 서투른 ‘부키요사’(不器用さ)가 오히려 매력이라 불리던 투박한 독불장군이었다. 아마도 예측 불가능한 트럼프 대통령과 원만한 관계를 형성해 미-일 관계를 안정화하는 게 일본의 ‘국익’이라고 믿고, 내키지 않는 칭찬의 말들을 내뱉은 것임이 틀림없었다. 아사히신문은 이 기묘한 광경에 대해 “총리의 표정은 일관되게 딱딱했고, 평소 회견 때보다 말하는 속도가 느렸다”는 묘사를 남겼다.
물론, 1기 때 트럼프 대통령과 밀월 관계를 구축했던 아베 전 총리를 시작으로, 지난 24~25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의를 무사히 마친 마르크 뤼터 사무총장까지 ‘트럼프 비위 맞추기’는 모든 이들이 어느 정도는 감수해야 할 일종의 국제적인 통과의례가 됐다. 심지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마저도 북-미 간의 대화가 이뤄지던 2018~2019년엔 달콤한 여러 말들로 트럼프 대통령의 환심을 얻으려 필사적인 노력을 했다.
그래서 이런 시도는 성공했을까. 이시바 총리는 대등한 미-일 관계를 만들겠다는 오랜 ‘지론’을 꺾으며 미국에 납작 엎드렸지만, 지금까지 무엇을 얻었는지 분명치 않다. 먼저 무역이다. 일본은 ‘트럼프 관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카자와 료세이 경제재생상을 교섭 대표로 내세워 29일 현재까지 미국과 일곱차례에 걸친 강도 높은 각료급 협상을 벌였다. 특히 지난 16일 미-일 정상회담에서 핵심 쟁점인 자동차 ‘품목 관세’(25%)에 대해 가시적 성과를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이시바 총리는 회담 뒤 “우리나라에게 자동차라는 것은 정말로 큰 국익”이라고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안보도 마찬가지다. 일본 언론들은 지난 22일 “미국이 일본에 방위비(국방예산)을 국내총생산(GDP)의 3.5%까지 올리라는 구체적인 수치 목표를 비공식적으로 제시”해 일본 정부가 7월1일로 예정됐던 외교·국방장관 회의(2+2 회의)를 연기했다고 전했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나흘 뒤인 26일 “미국이 (국방예산 5% 공약을 이끌어낸) 나토와 유사하게 여러 동맹국들에 비슷한 주문을 내리고 있다”고 말했다. 한·일 모두에 똑같은 압박이 가해지고 있으니, 여기에서도 일본을 향한 ‘에누리’는 없었다고 단정할 수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트럼프를 향한 ‘쪼찡’이 기대와 달리 큰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하노이 노딜’ 이후 반년이 지난 2019년 8월이었다. 저명한 미국 언론인 밥 우드워드가 “실망한 연인의 편지” 같다고 묘사한 5일치 친서에서 김 위원장은 “저는 분명히 기분이 상했고, 이를 각하에게 숨기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적었다. 이시바 총리 역시 이 사실을 깨닫고 사흘 전 간다던 나토 정상회의 참석을 출발 직전(23일) 취소한 것은 아니었을까.
의외로 ‘쪼찡’이 통하지 않는 트럼프 대통령의 모습 속에서 그가 내세우는 현실주의의 엄혹한 실체를 본다. 미국의 이익만 내세우는 트럼프 시대에 대충 말로 비벼 지켜낼 수 있는 국익은 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운 사람이다. 그의 존재는 우리에게, 진정한 국난이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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