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톺아보기-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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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6·25 75주년을 앞두고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서 참전용사 외증손들이 참배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
지난 25일은 6.25 전쟁 발발 75 주기였습니다. 서울 현충원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기념행사가 열렸고, 많은 한국인들이 호국영령들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겼습니다.
주지하다시피 6.25는 휴일 새벽을 틈탄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됐습니다. 이 시점이 전쟁의 공식적인 시작이라는 건 국제적으로도 인정되고 있고 국내외 학계에서도 오래전 결론이 난 사안입니다.
그럼에도 북한과 함께 주요 참전국 이었던 중국의 시각에서 6.25 전쟁은 평가뿐 아니라 기본적 사실관계에 대한 인식도 크게 달라집니다.
“위대한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은 평화를 보위하고(保衛和平) 침략에 항거한(反抗侵略) 정의의 전쟁(正義之戰)이다.”-시진핑
이처럼 중국은 6.25를 ‘항미원조 전쟁’, 즉 “미국의 침략을 막고 북한을 지원하며 평화를 지킨 정의로운 전쟁”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당시까지 무패를 자랑하던 “미국에 첫 패배를 안긴 승전”이라고 선전해왔습니다. 이러한 해석과 메세지는 미중대립 격화와 함께 갈수록 강화되는 추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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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당시 쓰였던 항미원조·보가위국 선전물(좌)/패배를 모르던 미국에 첫 패배를 안겼다고 선전하는 최근의 게시물. [사진=인민망] |
중국은 우리와 달리 6월 25일이 아닌 10월 25일을 ‘항미원조 출국작전 기념일’로 지정해 자축하고 있습니다. 이날은 한반도에 투입된 중공군이 처음 교전을 치렀던 날입니다.
5년전 기념식에서 시진핑 주석은 “제국주의 침략 확장을 막았다”며 “이 전쟁에서 길러진 정신이 강대한 적을 이겨내는 데 큰 격려가 된다”고 밝혔습니다.
미국을 명시하지 않았을뿐 “과거 미국의 침략”을 막았고 “앞으로도 미국에 승리”할 것이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중국 공산당 기관매체 인민망에 따르면 올해 10월 25일에도 ‘항미원조 출국작전 75주년’ 기념행사가 예정돼 있습니다. 중국 당국은 이 행사를 올해 연례 최대행사중 하나로 다룰 것으로 관측되는 가운데, 시주석이 과연 어떤 발언을 할지 주목되는 상황입니다.
6년들여 대폭 확대 개장한 ‘항미원조기념관’...곳곳에 ‘시주석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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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미원조 기념관 내부 전시관 입구에 있는 마오쩌둥과 펑더화이 동상. [연합뉴스] |
시진핑 정권 들어 중국의 애국주의 교육이 매우 강화돼 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6.25는 중국이 건국이후 미국과 직접 대규모로 지상군을 동원해 벌인 처음이자 마지막 전면전으로 평가받습니다. 게다가 승리한 전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때문에 시진핑 정권에 있어 6.25에 대한 기억과 해석은 애국주의 고취 교육에 활용하기에 최적의 대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실제로 미디어를 총괄하는 중국 국가광전총국은 트럼프 1기때인 2020년 6.25에 대한 선전을 항일전쟁과 함께 ‘최우선 항목’으로 지정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또 비교적 최근에는 10월 25일뿐 아니라 6.25 정전협정 체결일인 7월 27일도 기념하기 시작했습니다. 미중대립이 격화되자 6.25를 내부결속 도구로 십분 활용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중국이 6년을 들여 5배 규모로 확장해 재개관한 압록강 접경지 단둥의 ‘항미원조기념관’은 6.25에 대한 그들의 시각이 가감없이 드러나는 곳입니다. 2014년 시주석은 애국주의 고취를 위한 상징적 공간과 같은 이곳의 대대적 확장을 직접 지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기념관에는 전쟁 과정, 격전지, 북한 재건에 대한 기여 등을 소개하는 전시물들이 즐비한데, 그 사이사이에는 소위 ‘시 주석 어록’이 새겨져 있습니다. 몇가지만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전 인민의 강력한 지원이 있었기에 공동의 적에 대한 분노로 단결할 수 있었고 강대한 적을 이기고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전사자들은 중화민족의 영웅이라는 명예에 부끄럽지 않고 조국과 세계 평화를 수호한 자들로서 ‘가장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칭호에 걸맞다.”
“위대한 항미원조 정신이란 모든 것 위에 조국과 인민의 이익을 두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애국 정신이다.”
전시관 마지막 구역에는 시주석 뿐 아니라 마오쩌둥까지 중국 역대 지도자들의 사진과 함께 6.25 관련 어록들이 전시돼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어록들의 길이는 후대로 갈수록 점점 길어져 시주석의 경우 무려 9행에 달합니다.
일부는 섬뜩하기도 한 이 어록들이 가리키고 있는 건 가난하고 약했던 중국이 단결과 영웅적 헌신으로 강대한 미국을 이겼다는 서사입니다. 이 같은 서사는 어록뿐 아니라 전시물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됩니다.
흔적조차 없는 ‘北의 남침’ 과 김일성-마오쩌둥의 참전모의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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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소련 외무성이 1966년 8월 9일 작성해 소련공산당 중앙위 대외연락부 부부장이었던 올렉 라흐마닌에게 보고한 문서. 이 문서에서도 6.25가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사실이 확인된다. |
5배나 확대 개관했지만 중국의 항미원조 기념관에는 어디에도 6.25 발발의 핵심 원인인 북한의 남침에 대한 것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를 대신하는 건 “미국의 침략은 중국에게 심각한 위협이었고, 중국은 ‘자위적 전쟁’을 벌였다” 는 선전논리입니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950년 6월 25일 한반도에서 내전이 발생하자 미국이 조선 내정에 개입했다. 중국의 거듭된 경고에도 미국은 유엔 안보리를 조종해 불법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주로 미군으로 구성된 유엔군과 함께 침략전쟁을 확대했다. 중국은 조선의 요청과 자국을 방어하기위해 어쩔수 없이 평화와 정의의 수호자로 나섰다.”
시주석이 6.25를 “평화 수호, 침략에 반대하는 정의의 전쟁”이라고 규정한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이 같은 해석과 논리가 지배하는건 당연하게도 이 기념관내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중국 일선학교에서 쓰이는 역사교과서 부터 언론 보도, 중국 최대 포탈 바이두 등 어디서나 마찬가지 입니다.
북한의 남침뿐 아니라 마오쩌둥이 김일성, 스탈린과 함께 사전에 모의했었던 사실 역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전쟁 개시 주체를 흐림으로써 중국의 참전이 ‘자위적’이고 ‘정당한’ 개입임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마오쩌둥 “대만해방 미루고 한반도 무력 통일 먼저...싸움은 중국 밖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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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10월 1일 중국 베이징 톈안먼 성루에서 열병식을 함께 지켜보고 있는 김일성과 마오쩌둥. [연합뉴스] |
1950년 5월 15일 마오쩌둥은 남침 전쟁에 동의해줄 것을 요청하러 온 김일성에게 “중국은 대만 해방후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스탈린이 이미 동의한 이상 준비 중인 대만 해방 작전을 미루고 한반도 무력 통일을 1순위로 두기로 했다”면서 전폭 지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김일성에게 전술적 충고와 함께 국공내전에 참전했던 조선족 병력 5만여명을 흔쾌히 넘겨주기로 했습니다.
물론 마오쩌둥의 결정이 단지 김일성의 파병 요청과 스탈린의 동의 때문인 것만은 아닙니다. 모든건 마오쩌둥과 공산당 수뇌부의 전략적 판단의 결과였습니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한반도를 해양세력으로부터 중국 대륙 침략을 막아주는 완충지대로 인식해왔고 이용해왔습니다. 때문에 미국이라는 안보위협에 맞설 북한이라는 완충지대는 지금도 그때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대부분의 중국 학자들은 미국이 중국에 안긴 안보 불안이 중공군 개입의 직접적 원인이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의 반격이 38선 이남에서 멈췄다면, 중공군의 대대적 개입도 피할 수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천젠 코넬대 교수와 소련 붕괴 후 공개된 사료들에 따르면, 중국은 늦어도 인천상륙작전 이전인 1950년 8월 이미 대규모의 중공군 투입을 결정했고 그로부터 한 달여 전 이미 전쟁 준비에 돌입한 상태였습니다.
즉, 중공군 개입은 연합군의 북진과 상관없이 미국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고 본 중국 지도부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이왕 전쟁을 해야 한다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게 중국 영토 바깥에서 치르는 편이 낫다고 본 겁니다.
심지어 중국은 전쟁 결과에 따라 미국과 딜을 통해 한반도 일부와 대만을 맞바꿀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또 당시 소련에 정치경제적으로 크게 의존하고 있던 중국은 군의 현대화를 위해 소련의 군사경제적 지원이 절실했습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중국과 미국의 관계 개선을 의심하는 스탈린의 경계심을 파병으로 불식시킬수 있다고 봤습니다.
6.25 ‘내전’ 강조하는 中...대만침공 정당화 복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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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중국 주석이 지난 2020년 10월 23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6.25전쟁 참전 70주년 기념대회 참석을 위해 입장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
최근 중국의 군사·비군사적 압박으로 양안긴장은 금세기 들어 어느때보다 고조된 상태입니다. 시주석은 군 현대화 목표에 맞춰 2027년까지 군부에 대만 침공 준비를 완료할 것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만약 중국이 실제로 대만 침공을 단행하고 미국이 이를 방어하려 나선다면 미중 양국은 6.25 이후 처음으로 전면무력충돌로 치닫게 됩니다.
공교롭게도 중국에서는 최근들어 6.25의 역사적 의미를 ‘양안 통일’ 문제와 연결짓는 움직임을 노골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정치 연설이나 외교 수사에서 뿐 아니라, 일선학교의 핵심 교육자료인 역사 교과서에서도 드러납니다.
대표적으로 중국 일선 학교 대부분이 채택중인 인민교육출판사의 ‘중국역사’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1950년 조선에서 내전이 발발했고, 미국은 즉시 파병하여 조선을 침략했다. 미군 중심의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진격했고, 제7함대는 대만 해협에 진입해 대만 해방을 가로막았다.”
여기서 북한의 남침이라는 전쟁의 발단은 의도적으로 지워졌습니다. 대신 미국의 대중 봉쇄 전략이 전쟁 발발과 중공군 개입의 원인인 것처럼 씌어져 있습니다. 미국의 개입을 침략으로 규정하는 동시에, 그 배경에 ‘대만 해방’이라는 민족주의적 과제가 있었다는 인식을 심으려는 모습입니다.
이와관련, 일본 게이오대에서 중국 현대사를 연구하는 돤루이총(段瑞聡) 교수는 “과거 교과서에서는 ‘미 제국주의가 전쟁을 일으켰다’고 가르쳤는데 지금은 ‘내전이 발발했다’는 표현으로 바뀌었다. 이는 명백한 변화”라고 지적했습니다.
참전과정에 있어서도 “미국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대만 해방 저지’를 강조함으로써 현재의 ‘양안 통일’ 서사로 정당성을 확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도 최근 항미원조 전쟁을 설명한 기사에서 “전쟁 발발 직후 미국이 대만해협에 병력을 파견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다른 기관 매체들은 물론 관변 학자들 역시 개입 정당화의 근거로 미국의 7함대 파견을 빠짐 없이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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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개봉해 역대 중국 영화 흥행 2위를 기록한 ‘장진호’ 홍보 포스터. 6·25를 배경으로 미군과 맞서 싸우는 중공군의 활약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바이두 캡처] |
6.25의 의미를 대만 통일이라는 현재의 과제와 연결지으려는 시도는 단순한 역사 해석차원의 변화로만 볼 수 없습니다. 자국내 결속을 강화하고, 외부 개입의 정당성을 사전에 무력화하려는 ‘전략적 서사 구축’으로 봐야합니다.
그 서사의 중심에는 ‘내전이었기에 외세의 개입은 침략’이라는 프레임이 있습니다. 만약 양안사태가 발생할 경우, 과거 6.25와 마찬가지로 “중국 내정 문제”로 규정하고 국제사회의 대응을 차단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목적을 위한 사실 왜곡과 정치적 서사는 점차 견고해지고 있습니다.
전쟁의 실상을 흐리고 과거를 ‘미래 전쟁의 정당화 도구’로 재활용하려는 시도는 위험합니다. 특히 현재 중국이 기억하려는 6.25는 ‘과거의 전쟁’이 아닌 ‘앞으로의 전쟁’을 준비하는 방식일 수도 있습니다. 한국이 그 방향과 이면에 숨은 의도를 더 경계하고 직시해야만 하는 이유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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