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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이 가능해지는 곳...허수경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오늘의 책)

MHN스포츠 이나영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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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이 가능해지는 곳...허수경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오늘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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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HN 이나영 인턴기자) 이 여름, 함께할 만한 책으로 허수경 시인의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를 소개한다.

1964년 진주에서 태어난 허수경 시인은 1992년 독일로 떠나 고고학을 공부하며 생의 절반을 이국에서 보냈다. 독일에서도 꾸준히 모국어를 통한 작품 활동을 이어가던 그는 위암으로 향년 54세에 세상을 떠났다.

1992년 출간된 그의 시집 '혼자 가는 먼 집'의 표제작은 2024년 대한민국 시인들이 꼽은 '지난 100년, 가장 좋아하는 국내 시 5편'에서 3위에 오를 만큼 시사에 각인된 작품이다. 이후 202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출제되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는 시인의 생전에 마지막으로 출간된 시집이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허수경|문학과지성사

전쟁과 문명 비판 등 실천적인 의식이 두드러진 시들과 더불어 슬픔과 그리움 등을 노래하며 여리고도 고유한 감각이 빛나는 작품들이 허 시인의 시세계를 고루 점유했다. 독일로 떠난 이후 발표된 그의 작품들은 국경을 넘나드는 고고학적 사유와 유목적 감각의 결합이 두드러진다고 평가된다. 이주 이후 발표된 첫 시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에는 "지구적 지성과 모국어 리듬의 거의 완벽한 결합", "전지구적 지성의 발언(산문)을 주술적 울림(음악)이 거의 완벽하게 받아낸다"는 수식이 붙여지기도 했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는 새로운 시공간성이 들어섰던 후기 시세계의 연장선에 있는 시집이다. 이방인의 위치에서 이국의 거리와 광장과 역을 떠돌며 쓰인 62편의 시가 수록되었다.


시인의 말에서 그는 말한다. "영원히 역에 서 있을 것 같은 나날이었다"

이 아득함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가방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그 예감은 참, 무참히 돌이킬 수 없었다"('돌이킬 수 없었다') 그것은 생생했던 기억과 사랑들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고 짐작할 때, 우리가 가차 없는 시간이 주관하는 삶의 이방인임을 확인하는 감각과 연결되는 듯하다. 시인은 시 '눈'에서 물었다. ▶"얼마나 오래/ 이 안을 걸어 다녀야/ 이 흰빛의 마라톤을 무심히 지켜보아야// 나는 없어지고/ 시인은 탄생하는가" ▶"모든 죽음이 살아나는 척하던/ 지독한 봄날의 일/ 그리고 오래된 일"('오래된 일')을 시인은 어떻게 다뤄야 하는 것일까.

이 한계 앞에서 시인은 그리움과 회상의 자리에 머물기를 선택한다. 선형적 시간이 아니라, 영원성이 가능한 시간, "오래된 시간"을 상상하며 연인과의 사랑과 이별을 되풀이한다. ▶"열매들이 올 거다/ 네가 잊힌 빛을 몰고 먼 처음처럼 올 거다"('포도') ▶"기적처럼 이제 곧/ 푸르게 차오르는 냇물의 시간이 온다는 걸/ 가재와 붕장어의 시간이 온다는 걸/ 선잠과 어린 새벽의 손이 포플러처럼 흔들리는 시간이 온다는 걸/ 날아가는 어린 새가 수박빛 향기를 물고 가는 시간이 온다는 걸"('수박') ▶"먼 사랑처럼 기어이 휘어지면서 오이가 열리든 말든"('오이')


먼 처음, 오래된 시간, 먼 사랑, ▶"영영 오지 않을 꿈의 입구를 그리워하는 계절"('딸기')과 같은 중첩된 시간의 표현들이 가능해지는 곳. 그곳은 시인이 ▶"영원의 고아"('지구는 고아원')가 되는 시적인 장소다. 우리가 ▶"얼어붙은 채" 불가능한 재회를 성사시키는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 "빙하기의 역"('빙하기의 역에서')이다.

과일과 열매들을 시적 대상으로 동원하면서 짧고도 강렬한 장면과 감각이 인상적인 이 시집은 어떤 계절 중에서도 여름을 닮아 있다. 작열하는 짧고도 뜨거운 여름이 한바탕 지나갈 것을 짐작하게 될 때, 우리는 허수경의 시에서 영원의 여름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의 가장 서러운 곳으로 가서

농담 한 송이 따서 가져오고 싶다.
그 아린 한 송이처럼 비리다가
끝끝내 서럽고 싶다.
나비처럼 날아가다가 사라져도 좋을 만큼
살고 싶다.

▶'농담 한 송이' 전문

당신의 눈 속에 가끔 달이 뜰 때도 있었다 여름은 연인의 집에 들르느라 서두르던 태양처럼 짧았다
(...)
가난하고도 즐거워 오랫동안 마음의 파랑 같을 점심식사를 나누던 빛 속, 누군가 그 점심에 우리의 불우한 미래를 예언했다 우린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우린 그냥 우리의 가슴이에요

불우해도 우리의 식사는 언제나 가득했다 예언은 개나 물어가라지, 우리의 현재는 나비처럼 충분했고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그리고 곧 사라질 만큼 아름다웠다
(...)
지난 여름 속 당신의 눈, 그 깊은 어느 모서리에서 자란 달에 레몬 냄새가 나서 내 볼은 떨린다 레몬꽃이 바람 속에 흥얼거리던 멜로디처럼 눈물 같은 흰 빛 뒤안에서 작은 레몬 멍울이 열리던 것처럼 내 볼은 떨린다

달이 뜬 당신의 눈 속을 걸어가고 싶을 때마다 검은 눈을 가진 올빼미들이 레몬을 물고 레몬향이 거미줄처럼 엉킨 여름밤 속에서 사랑을 한다 당신 보고 싶다, 라는 아주 짤막한 생애의 편지만을 자연에게 띄우고 싶던 여름이었다

▶'레몬' 일부

사진=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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