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한국일보 언론사 이미지

"김애란은 사회학자"… 생기발랄하게 계급 의식 비트는 8년 만의 소설집

한국일보
원문보기

"김애란은 사회학자"… 생기발랄하게 계급 의식 비트는 8년 만의 소설집

속보
與, 22일 내란전담재판부 설치법 우선 상정
[책과 세상]
김애란 소설집 '안녕이라 그랬어'


김애란 작가.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애란 작가. 한국일보 자료사진


"우리 그 말 쓰지 말자. 메이드란 말."

'은주'는 남편 '지호'와 함께 비행기로 7시간 거리인 이국의 숲속 목조주택을 빌려 한 달 살기 중이다. 저렴한 현지 물가와 적은 숙박 비용에 만족했던 것도 잠시 "노동력이 싸다는 사실만은 여전히 어색한" 은주. 매일 숙소를 관리해주는 '그녀'가 자기 또래라는 걸 알고부터는 "노골적인 계급 차에 좀 쩔쩔"매기 시작한다. 뭐라고 불러야 하는가부터 난관. "그냥 '청소해주시는 분'은 어때?"

김애란(45)의 단편소설 '숲속 작은 집'의 한 대목이다. 우리가 익히 알던 그 김애란이 돌아왔다. 특유의 생기발랄한 문장으로 계급 문제를 똑바로 응시한 단편 7편과 함께. 8년 만의 새 소설집 '안녕이라 그랬어'가 최근 나왔다.

'8년 만' 김애란의 5번째 소설집


40대가 된 김 작가의 소설에는 지방에서 상경해 도시 변두리의 월셋방을 전전하는 20대 취준생이 더는 없다. 모 대학의 최고경영자 과정에서 만난 인맥 모임에 초대받거나('홈 파티') '조금 더 보태서라도 집을 살걸' 후회하는 40대 세입자 부부('좋은 이웃'), 산뜻한 중년이 되고 싶었지만 빼도 박도 못하는 기성세대가 됐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 남성('이물감')이 나온다.

칼날이 무뎌졌다기보단 더 진화했다는 표현이 맞겠다. '메이드'라는 표현이 불편했던 은주는 언젠가부터 흐트러져 있는 욕실용품을 보고 '팁'의 문제임을 직감한다. 돈이 "실은 제일 중요"하다는 나와 돈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나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돈만 덜렁 놓는 건 예의가 아니다 싶어 휴대전화 번역기 앱을 동원해 현지어로 눌러쓴 감사 쪽지를 함께 남긴다. 날마다 수양하는 마음으로 '감사합니다'를 쓴다. 그러다 또 기분이 확 나빠진다. 내가 왜 돈을 줘가면서 이런 수고를 해야 하나 싶다. '그녀'를 도둑으로 오해하는 마지막 부분에선 계급적 우월감도 묻어난다.

은주는 지호와의 "결코 좁혀지지 않는 간극"을 통해 또다른 계급차를 확인하기도 한다. 회사를 그만두고도 혼자 사는 노모에게 꼬박꼬박 용돈을 보내야 하는 은주와 달리 부모 돈으로 이층짜리 커피숍을 낸 지호한테는 "귀족적 천진함"과 "무심한 순진함"이 배어 있다. 돈 문제는 알아서 하겠다고 언성을 높이는 은주에게 지호는 냉소인지 연민인지를 보낸다. "그럼 정말 알아서 하든지 아님 그냥 고맙다고 하든지. 둘 중 하나만 하자."


안녕이라 그랬어·김애란 지음·문학동네 발행·320쪽·1만6,800원

안녕이라 그랬어·김애란 지음·문학동네 발행·320쪽·1만6,800원


"계급에 반응하는 센서… 김애란은 사회학자"


첫 수록작 '홈파티'는 "사회적 공간 속을 떠다니는 감정의 입자를 포착하고 그것에 명료한 표현을 부여하는 특유의 능력을 예리하게 발휘한 소설"이라는 평과 함께 2022 김승옥문학상 우수상을 받은 작품. 비단 '홈파티'에만 한하는 상찬은 아니다.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이면의 감정 너울까지도 포착해내는 관찰력은 소설집 전체에서 빛을 발한다.

'이물감'에서 '기태'는 거래처의 고위 간부나 임원의 낯빛에서 "내장의 관상"을 읽어낸다. 오랜 시간 질 좋은 음식을 섭취한 이들의 편안한 내장이 자아내는 표정이란다. 재료뿐 아니라 먹는 방식과 속도 등이 만들어낸 특유의 분위기라니, 뭔지 알 것 같다. '홈파티' 속 '이연'은 오 대표의 집에 있는 현대 회화 작품, 아프리카풍 나무 조각품들, 진짜 아라비아산 카펫에서 "서사적 윤기"를 알아챈다. 물건 하나하나에 깃든 "집주인의 시간과 체력, 미감과 여유"에서 비롯한 윤택함이다.

그런가 하면 오 대표는 만 18세가 되면 시설에서 나와야 하는 아이들이 자립정착금 500만 원으로 명품 가방을 산다고 비아냥댄다. 이연은 "밥은 남이 안 보는 데서 혼자 먹거나 거를 수 있지만 옷은 그럴 수 없으니까. 그나마 그게 가장 잘 가릴 수 있는 가난이라 그런 것 같아요"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빗방울처럼'에는 "그럼 더 상급지로 간 거야?"라는 직장 동료의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지수'가 있다. 거주지에 따라 '급'을 나눈다니 자신이 개천의 물고기가 된 기분이 들어서였다.


이렇듯 화자들은 공통적으로 "계급의 표지"에 특히 잘 반응하는 센서를 장착하고 있다고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해설에서 짚었다. 그는 "'문화자본'이나 '아비투스' 같은 학술 개념 없이도 그와 관련있는 사회학적 징후들을 포착하는 데 뛰어나다"며 "누군가를 사회학자라고 규정할 자격이 사회학자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면, 나는 김애란이 오랫동안 사회학자였고 이제야말로 유감없이 그렇다고 주장할 것이다"라고 했다.

권영은 기자 you@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