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에게 소설은 인간에 대한 탐구였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
강의실을 상상해보자. 한 남자가 들어온다. 이 소설 창작 수업의 강사다. 이름은 밀란 쿤데라. ‘농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느림’ ‘무의미의 축제’ 등을 쓴 소설가다.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이지만, 그의 강의는 프랑스어로 진행된다. 그는 1968년, ‘프라하의 봄’에 참여한 뒤 정치적 탄압을 피해 1975년 프랑스로 망명했고, 이후 프랑스어를 자신의 창작 언어로 선택했다. 망명자의 필연적 결정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실은 언어에 대한 통제 욕구와 미학적 전략이 반영된 결과다. 그는 자신의 문장이 번역자를 거치며 의미가 흐트러지는 것을 견디지 못했고, 프랑스어 번역본을 직접 교정했다. 또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결국 프랑스어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소수민족 출신 작가로서 국제 무대에 목소리를 내기 위해선 보편성을 갖춘 언어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언어는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닌, 작가의 미학과 그가 세계와 접촉하는 방식, 정체성의 재구성을 의미했으니까. 얼마나 전략적인가. 당신이 소설가를 그저 감정적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해다. 밀란 쿤데라가 말하지 않았던가. 작가의 재능 중 50퍼센트는 전략이라고.
2023년에 세상을 떠난 그가 돌아와 우리에게 ‘소설가의 전략’을 전수한다면,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까? 아마도 가장 먼저 소설의 정의를 묻지 않을까. 내가 알기로 그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오직 소설가들뿐이다. 그 질문이 곧 ‘어떻게 쓸 것인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쿤데라에게 소설은 인간에 대한 탐구였다. 탐구는 ‘정답’을 전제하지 않는다. 답은 없을 수도 있고, 여러 개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인간 본성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상상하며, 판단을 유예하는 일이고, 그에게 소설은 그런 실험이 가능한 장소였다. 그 안에서 이뤄지는 모든 실험은 가능성의 탐색이며, 진실이라기보다 하나의 가설에 가깝다. 그는 우리에게 ‘진실’ 같은 말은 깨끗이 포기하라고 말한다. 그런 것은 언어로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소설의 역할은 무엇인가? 쿤데라의 답은 명확하다.
“작가의 작품은 일종의 ‘광학기구’에 불과합니다.”
어떤 사물이나 인간, 상황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일 뿐이라는 뜻이다. 독자는 그 시선을 통해 삶을 구성하는 복잡성과 아이러니를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게 된다. 그러니 이 실험실의 진짜 연구자는 작가가 아니라 독자가 아닐까.
그렇다면 쿤데라가 말하는 ‘전략’이란 무엇일까? 마음도 진심도 아닌 전략이라니…. 순수 문학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소설은 확실히 전략과 기술을 필요로 한다. 미학적 설계도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쿤데라는 소설 쓰기를 음악 작곡에 비유했다. 작곡가가 악보를 그리듯, 이야기의 흐름과 사유의 구조, 주제의 반복과 전환을 계산하고 조율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선율을 바탕으로 음, 리듬, 화성에 변형을 가해 변주곡을 만들듯, 그의 소설도 하나의 테마를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한다. 이를테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는 ‘존재의 가벼움과 무게’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각각의 인물들이 서로 다른 사유의 변주를 이룬다. 다시 말해, 인물은 하나의 결론을 향해 나아가는 서사의 도구가 아닌, 다양한 사유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장치인 것이다.
하지만 좋은 설계도만으로는 살아 숨 쉬는 소설을 쓸 수 없다. 소설의 생동감을 주는 것은 구조가 아니라 그 구조를 흔들고 어긋나게 하는 요소들이다. 쿤데라의 무기는 ‘아이러니’였다. 구조가 세운 의미를 끊임없이 흔드는 아이러니. 마지막 작품, ‘무의미의 축제’에서 쿤데라는 무의미한 대화, 농담, 상상으로 본질적인 것을 드러낸다. 이를테면 평소에 거의 인식하지 않는 신체 부위, ‘배꼽’으로 삶의 근원을 묻는다. 철학이나 신화가 아닌 배꼽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작고 우습지만,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근원이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아닌가. ‘소설은 이론의 정신에서가 아니라, 유머의 정신에서 태어났다’는 쿤데라의 세계관에 배꼽만큼 어울리는 상징이 또 있을까?
하지만 매일 개연성 없는 소설 같은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종종 소설이 과연 무슨 쓸모가 있을지 의심하게 된다. 이 회의적 시선에 쿤데라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시인은 인간을 미화하고, 철학자는 인간을 정의하지만, 소설가는 인간을 ‘이해 불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그가 탐색하는 것은 행위에 선행되는 모호한 동기, 다중적인 정체성, 스스로 주체인 줄 알지만, 결국 우연과 운명 속에서 허덕이는 나약함이다. 그러니 소설이 삶의 크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해주리라는 기대는 애초에 접어야 한다. 소설은 그저 모든 판단과 결론을 미뤄둘 수 있는 유예의 장소를 허락할 뿐이다. 그곳에서는 존재에 대한 실험을 감행해도 누구도 다치지 않고, 진실이나 진리의 엄격한 잣대에 주눅 들지 않고 삶의 하찮음을 말할 수 있다. 의미 없는 것들의 의미를 말하는 일. 그것이 쿤데라가 말하는 소설의 쓸모가 아닐까.
이제 소설을 써보겠는가? 어쩌면 당신은 소설만이 포착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 인간의 보잘것없는 삶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생을 향한 커다란 애착 같은 것. 쓰고 나면 알게 되지 않을까. 우리의 배꼽이 얼마나 웃기고 서글픈지를. 배꼽을 지닌 우리가 얼마나 안쓰러운 존재인지를.
신유진 작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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