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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첨단 의료기술 전하고 심층적인 ‘국호 연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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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첨단 의료기술 전하고 심층적인 ‘국호 연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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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이의 발자취] 19일 별세한 재미동포 의사 오인동 선생을 추모하며

고인이 2017년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고인이 2017년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하버드대 교수 지낸 인공고관절 명의
1992년 방북 계기로 통일문제 관심
북한 의사들에게 수술법 전수하고
직접 발명특허 낸 수술도구 전해
‘꼬레아 국호 되찾기 작업’에도 열의
‘국호 연구’ 학술 논문에 전문서도 내

2011년 한겨레통일문화상 받아

재미동포 외과의사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길에 헌신해온 오인동 박사가 지난 19일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1939년생으로 향년 86. 인공고관절 수술 분야에선 하버드 의과대학 교수를 지낸 세계 제1의 의사였을지라도 대장암을 이기진 못하신 모양입니다. 지난 1월까진 매달 두세번 이메일과 전화 등으로 인사를 주고받았는데, 5월엔 너무 야위어 몰라볼 정도였다는 지인의 귀띔에 이어 6월 사모님으로부터 부음을 받았으니까요.

선생이 한국에 널리 알려진 건 아마 2010년 서울에서 출판된 ‘평양에 두고 온 수술가방: 의사 오인동의 북한 방문기’(창비)였을 겁니다.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과 미국의 셀리그 해리슨 기자 겸 학자가 추천사를 쓴 그 책을 저도 읽고 감동 받아 즉각 이메일을 보내 교분을 쌓기 시작했거든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책이죠. 1992년 평양 방문을 계기로 통일문제에 관심을 갖고 모국의 근현대사를 공부하다 체계적인 통일운동을 위한 연구모임을 만들어 미국의 주요 언론에 칼럼을 발표하기도 하고 미국 행정부와 의회 등에 한반도정책 제안서를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남북 지도자들에게도 통일정책 건의서를 전달했고요. 2009년엔 평양의과대학병원에서 북한 의사들에게 ‘20세기 3대 첨단의학의 하나’인 인공고관절 수술법을 전수해주고 수술기구와 ‘11종의 발명특허’를 획득한 인공관절기와 수술기구 등을 모두 기증했습니다. 2010년에도 수술법을 가르쳐준 뒤 관절기와 수술도구가 꽉 찬 가방들을 평양에 두고 왔습니다.

‘평양에 두고 온 수술가방’ 표지.

‘평양에 두고 온 수술가방’ 표지.

통일활동가로 ‘6·15선언실천 미국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기도 하면서 2011년에는 한겨레통일문화상을 받았습니다. 2012년엔 원광대와 제 집에도 오셔서 책 두권을 선물하시더군요. ‘꼬레아, 코리아: 서양인이 부른 우리나라 국호의 역사’(책과함께·2008)를 읽고는 놀라움과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의사가 2000년대 초부터 ‘Corea 국호 되찾기 작업’에도 전념하면서 이에 관한 학술논문을 여러 편 발표한 걸 잘 알게 됐거든요. 저도 ‘조선’과 ‘대한민국’이란 국호의 유래와 역사 등을 좀 공부했지만, 우리 국호에 관해 역사학자나 정치학자들보다 더 깊은 연구 같았습니다. 다른 책 ‘통일의 날이 참다운 광복의 날이다: 밖에서 본 한반도’(솔문·2011)에서는 남북이 국호를 ‘꼬레아(Corea)연방 공화국’으로 통일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몇년 뒤엔 통일 한반도의 국호를 조선도 한국도 아닌 高麗로 하되, 한글로는 당시 실제 발음이었던 ‘고리’로 쓰고 영문으로는 굳이 서양식의 Corea가 아니라 ‘Gori’로 표기하자는 논문을 발표했고요.

2013년 만났을 때는 그 무렵 출판한 ‘밖에서 그려보는 통일의 꿈: 남북연합방’(다트앤·2013)을 건네시더군요. 이 책에는 “남북이 만나 Corea연합방을 선포하고, 남의 정교한 인공위성을 북의 은하로켓에 실어 궤도에 올리자”는 재치있고 유쾌한 제안을 담기도 했습니다.

2011년 한겨레통일문화상 시상식. 왼쪽이 고인, 오른쪽은 공동 수상자 고 이행우 선생, 가운데는 임동원 당시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이사장.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2011년 한겨레통일문화상 시상식. 왼쪽이 고인, 오른쪽은 공동 수상자 고 이행우 선생, 가운데는 임동원 당시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이사장.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고인(왼쪽)이 2012년 자택을 배경으로 필자와 찍은 사진.                이재봉 교수 제공

고인(왼쪽)이 2012년 자택을 배경으로 필자와 찍은 사진. 이재봉 교수 제공


2012년 ‘재미동포 아줌마, 북한에 가다’라는 방북기로 널리 알려지고 2015년 한겨레통일문화상을 받은 신은미 교수에게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을 일깨우며 통일운동가로 이끄신 분이기도 합니다. 저에겐 미국에 갈 때마다 강연모임을 주선해주셨고요. ‘밖에서 그려보는 통일의 꿈: 남북연합방’ 머리말에 선생이 신 교수 남편 정태일 경제학자와 한 토론과 저와의 의견 교환 등을 소개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인연으로 선생과 저 그리고 신은미 부부 등이 10여년 전 의형제를 맺었습니다. 저는 16살 위의 선생을 거리낌없이 ‘형님’으로 불러왔지만, 제 동갑내기 정태일은 아무리 의형제를 맺었어도 저토록 존경스러운 분을 어찌 감히 형님으로 부를 수 있느냐며 끝내 ‘선생님’으로 불렀지요.

선생은 문학과 예술 분야에도 관심과 조예가 깊었습니다. 1980년대에는 사시던 로스앤젤레스 지역에서 한국예술재단을 창립해 회장을 맡고, 1990년대엔 로스앤젤레스 교향악단 이사를 지내셨답니다. 그리고 40년이 넘는 미국 생활에도 한국어 쓰기를 소홀히 하지 않고 수필가로 등단해 2013년엔 윤동주문학사상선양회로부터 ‘윤동주 민족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지난 몇년 남북이 적대관계로 변하는 것에 애통해하며 울분을 표하기도 하시느라 병이 악화했으리라 짐작합니다. 유언에 따라 시신을 의과대학병원에 기증하느라 장례식도 치르지 않는데, 선생의 혼이라도 남북관계 호전과 한반도 평화를 하루라도 빨리 지켜보게 되길 기원합니다.

이재봉/원광대 정치외교학·평화학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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