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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의 마지막 수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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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의 마지막 수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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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 우두머리' 결심 잠시 휴정…오후 2시 재개

[나는 역사다] 윤한봉 (1948~2007)



보통 사람들이 전두환이라는 이름도 잘 모를 때, 윤한봉은 전두환의 두번째 쿠데타를 염려했다. 1980년 5월15일에 운동권 후배들과 광주 야산에 모였다. 누가 들을까 염려해, 문자판에 글씨를 썼다 지워가며 필담을 나눴다. 윤한봉은 전두환이 두번째 쿠데타를 일으킬 것을 예측했다. 쿠데타가 터지면 전국적인 항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 전두환은 1980년 5월17일에 두번째 쿠데타를 했다. 윤한봉의 예상보다 빨랐다. 5월18일에 광주에서 시민과 계엄군이 충돌. 윤한봉은 서울과 다른 지역에서 항쟁이 터질 것을 바라고 서울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서울의 운동권을 만나 광주의 소식을 전하고 전국적인 민주화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다른 지역은 항쟁이 일어날 분위기가 아니었다. 윤한봉은 다시 광주로 향했는데, 이번에는 군대가 광주로 가는 길을 막아 들어갈 수 없었다.



내란음모죄, 윤한봉이 뒤집어쓴 누명이었다. 신군부는 “윤한봉이 김대중한테 돈을 받아 ‘폭동’을 주도했다”는 각본을 짰다. 나중에는 “5·18 이후 북한에 넘어가 교육을 받고 내려왔다”는 각본까지 만들었다. 윤한봉을 잡아 고문하고 거짓 자백을 받아내 대형 간첩단 사건을 조작할 셈이었다.



“형이 잡히면 형만 죽는 게 아니라 우리까지 다 죽소.” 운동권 후배들이 윤한봉에게 피신을 권했다. 체포될 경우를 대비해 윤한봉이 청산가리까지 가지고 다녀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윤한봉 본인은 칼을 가지고 다니며 자살 연습을 했다. 경찰이 들이닥칠 때 칼로 자기 가슴을 찌를 생각이었다.



1981년 4월에 밀항을 했다. 35일 동안 화장실에 갇혀 바다를 건넜다. 미국에서 망명을 신청했지만 전두환 정부의 눈치를 보던 미국 정부는 1987년에야 망명을 허가했다.



‘5·18의 마지막 수배자’로 불렸다. 윤한봉은 미국에서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했고, 1993년에 돌아와 5·18기념재단 사업을 했다. 폐병이 악화되어 숨을 거둔 날이 2007년 6월27일이다.



김태권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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