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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 '착근된 양자주의'로 미래를 열자 [아침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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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 '착근된 양자주의'로 미래를 열자 [아침을 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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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위협 공유가 많은 두 나라
독일과 프랑스 협력을 모델로
이재명 정부 과감한 행보 기대


현재 한국이 직면한 대외적 위협을 가장 많이 공유하는 국가를 찾는다면 그것은 일본이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 중국의 군사적 부상, 미국 외교정책의 불확실성, 그리고 양국이 에너지 수입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중동지역의 불안정성까지 다층적 도전이 양국에 몰려오고 있다. 유럽과는 달리, 미국과의 양자동맹 외에 제대로 작동되는 다자안보채널이 없는 한일 양국에게 작금의 도전은 자력으로만은 대응이 어려운 상황이다.

이런 인식을 공유하고 있기에, 이재명 대통령과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G7에서의 만남과 국교정상화 축전에서 일관되게 한일관계의 미래지향적 발전이라는 공통의 메시지를 냈다. 대선 후보시절 이재명 후보 측의 김현종 외교안보보좌관은 한일관계를 19세기 사쓰마와 조슈의 동맹(薩摩長州同盟)으로까지 비유한 바 있다. 반면 일각에서는 북중러 위협에 대한 한일 간 인식 차이로 인해 이러한 합의가 외교적 수사에 머무를 것이라고 우려한다.

'오직 닉슨만이 중국에 갈 수 있다'는 역설


그러나 민주당 다수 의회와 이재명 민주당 대통령의 당선은 역설적으로 한일협력의 호재가 될 수 있다. 국제정치에서 '오직 닉슨만이 중국에 갈 수 있다(Only Nixon can go to China)'는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반공 강경파인 닉슨이 중국과의 수교를 추진했듯이, 정권의 이념과 배치되는 외교정책을 추진하면, 국민들은 "자신의 이념과 맞지 않는데도 하는 것을 보니 정말 필요한 정책이구나"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반면 이념과 일치하는 정책을 추진하면 "옳든 그르든 자기 이념 때문에 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다.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이 대표적인 예이다. 진보 성향의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과의 관계 개선에 나섰을 때, 보수 진영에서조차 "김대중이니까 가능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노무현 정부에서 추진한 한미자유무역협정이 이념이 아니라 국익을 고려한 정책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추진 주체가 진보정부라는 점이 중요했다. 반면 박근혜, 윤석열 정부의 한일관계 개선 노력은 "옳든 그르든 자기 이념 때문에 하는 것"이라는 틀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드골-아데나우어의 교훈: 착근된 양자관계의 시작


그렇다면 '어떻게' 협력을 구체화할 것인가? 독불관계를 적대국에서 협력국으로 변모시킨 드골과 아데나우어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미·소 냉전 속에서 외교적 공간을 확보하려던 드골은 프랑스 단독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깨달았고, 베를린 위기를 겪은 아데나우어는 미국에 대한 안보의존이 항상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님을 절감했다. 협력의 필요를 느낀 두 지도자는 지속적인 대화와 교류를 통해 신뢰를 구축했다. 반독주의자로 알려진 드골은 독일을 방문해서 독일민족에 대한 찬사를 보냈고, 아데나우어는 전쟁범죄에 대한 사죄를 하며 양국 협력에 급물살을 탔다. 그 결과 1963년 엘리제 조약이 체결되었다.

엘리제 조약의 교훈은 명확하다. ①위협인식에서 차이가 있더라도 지도자 간 신뢰 형성을 통해 협력의 정서적 토대를 마련할 것, ②지도자는 양국 여론을 움직일 수 있는 과감한 메시지와 행보를 보일 것, ③확보된 협력 기회를 '착근'시키기 위한 다양한 인적·물적·문화적·제도적 교류와 협력을 진행할 것 등의 교훈을 얻었다. 실제 엘리제 조약 체결 후 양국은 청년교류(DFJW/OFAJ 설립), 양국 각료회의(Franco-German Ministerial Council), 국회의원 교류, 문화교류, 대학 학기 동조화 등을 통해 협력을 제도화했다. 크로츠와 쉴드(Ulrich Krotz and Joachim Schild)는 이를 착근된 양자주의(embedded bilateralism)라고 불렀다.


다행히 한일 간에는 이미 협력의 씨앗들이 싹트고 있다. 2021년 아프가니스탄 철수 과정에서 한국이 일본을 지원한 바 있고,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2024년에는 한일이 제 3국 위기시에 상대국 국민 대피를 지원하는 '재외국민보호 협력 각서'를 체결했다.

중국 위협에 대한 인식 차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의 표현을 빌어 "미국이 3시, 중국이 9시"라고 할 때, 결국 시침이 1시냐 2시냐의 차이에 불과하다. 국제 정세의 불안정성과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위협이 높아지고, 미국 외교정책의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시침의 차이는 줄어들고 한일 간 공동대응의 필요성은 더욱 커질 것이다. 한일 양국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외교적 수사만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제도와 교류로 뿌리내리는 '착근된 양자주의'에 대한 구상이다.

박종희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