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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밥벌이나 하는 주제에 잘하는 게 뭐가 있느냐고 물으면 듣기와 묻기라고 답하고 싶다. 계몽령을 말하는 사람들부터 음모론자까지 다양한 지인을 자랑한다. 묻기도 잘한다. 신입사원 시절, 동기들의 쉬는 시간까지 희생해가면서 강의 시간에 질문을 던졌다. 이 자리를 빌려 사과한다. 이 듣기와 묻기가 '능력'으로 각광받는 데에는 사회의 덕이 컸다. 그만큼 날카로워졌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 사회는 끊어지기 직전의 고무줄처럼 팽팽하다. '한국인의 정'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서로를 헐뜯기 바쁘다. 어떤 후보를 지지했는지만으로도 관계가 갈라지고, 카페에서 나눈 정치 이야기 한마디가 10년 우정을 끝내버린다.
아이러니하게도 '소통'이라는 단어가 사회 키워드로 떠오른 지 몇 년이 흘렀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하는 법에 관한 책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정작 우리는 서로와 단절되기 바쁘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어른들의 말이 새삼 그리워진다. 선배 세대가 희생으로 일궈낸 경제 성장과 민주화 토양 위에서 자란 우리는 모두 각자만의 주관과 가치관을 따르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런 차이를 무시한 채 오직 나의 가치관, 혹은 내게 도움이 되는 가치관만 인정한다는 점이다. 자신만의 세계관은 구축했지만 타인의 세계관을 인정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더 심각한 건 다른 생각을 '이겨야 할 것'으로 간주하는 문화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무너뜨려야 할 주적이 된다.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정치 논쟁을 보면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상대방의 논리를 듣기보다는 약점을 찾아 공격하는 데 몰두한다.
SNS 알고리즘은 내 취향에 맞는 콘텐츠만 보여주고, 직장과 학교에서도 사소한 정치적 견해 차이만으로 편이 갈린다. 다른 목소리는 차단하고, 같은 생각만 반복해서 듣다 보니 내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착각에 빠진다. 이런 상황에서 듣기와 묻기는 점점 희귀한 능력이 됐다.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듣는 것, 진심으로 궁금해하며 질문하는 것이 특별한 재능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나는 대화의 가능성을 믿는다. 어차피 모두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다. 서로를 적으로 만들어봤자 모두가 불행해질 뿐이다. 그래서 '무디게 대화하는 법'을 제안한다.
첫째는 존중이다. 상대방이 어떤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든, 어떤 가치관을 추구하든 그 자체로 존중해야 한다. '네가 틀렸고 내가 맞다'는 단순한 이분법은 명쾌할지언정 사회에 해악만 가져다준다.
둘째는 듣기다. 상대방의 말에서 논리적 허점을 찾기 전에 그 사람의 감정과 경험을 이해하려 노력해보자. 왜 그런 생각을 갖게 됐는지, 어떤 배경이 있는지 궁금해하다 보면 대화는 의외로 쉽게 열린다. 논쟁에서 이기는 쾌감보다 상대방을 이해하는 기쁨이 훨씬 크다
마지막으로 이기려 들지 말자. 대화는 설득의 기술이 아니라 공통분모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끝까지 손을 놓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임할 때, 우리는 이겨야 할 적에서 함께 살아갈 동료로 거듭날 수 있다.
한국 사회가 날카로워질수록 그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무딘 대화다. 예리한 말보다는 둥근 마음으로 접근하는 대화가 필요하다. 세상을 바꾸는 건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일상 속 작은 대화에서 시작되니까.
구현모 뉴스레터 어거스트 에디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