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먹구름 낀 '무지개 도시'
무지개 깃발 탄생한 샌프란시스코
프라이드 퍼레이드 등 기업 후원액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급감 '위기'
지난 18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의 캐스트로(Castro) 지구. 이 지구 이름을 딴 지하철역을 빠져 나오자, 바로 앞에 보이는 큰 사거리에서 페인트칠 작업이 한창이었다. 네명의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이 LGBTQ+(레즈비언·게이·바이섹슈얼·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를 통칭하는 약어)를 상징하는 무지개색 여섯 가지 색상을 아스팔트 바닥에 촘촘히 그려넣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시 남서쪽에 위치한 캐스트로 지구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LGBTQ+ 커뮤니티 중 하나다. 1917년 미 해군이 동성애자 축출 제도를 도입한 이후 군에서 강제 제대한 병사들이 이곳으로 모여들며 형성됐다. 캐스트로는 1977년 샌프란시스코 시의원에 당선된 하비 버나드 밀크(1930~1978)의 정치적 뿌리이기도 하다. 그는 미국 최초의 동성애자 커밍아웃 정치인이다.
LGBTQ+의 표식과도 같은 무지개 깃발은 1978년 이곳 캐스트로 지구에서 탄생했다. 미 육군 출신 예술가이자 밀크의 친구였던 길버트 베이커는 그해 샌프란시스코 프라이드 퍼레이드(성소수자 자긍심 행진)를 앞두고 "LGBTQ 커뮤니티만의 고유한 상징이 필요하다"는 요청에 무지개 깃발을 디자인했다. 애초에는 핫핑크와 청록색까지 8개 색으로 구성돼 있었다. 그러나 염료 부족 문제로 핫핑크가 빠지고, 이후 청록색도 파랑색과 통합되며 현재의 6개 색상이 됐다. 다양한 색상이 조화를 이루는 무지개를 통해 길버트는 성적 다양성과 포용성을 표현하고자 했다.
무지개 깃발 탄생한 샌프란시스코
프라이드 퍼레이드 등 기업 후원액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급감 '위기'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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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 30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도심에서 프라이드 퍼레이드 참가자들이 행진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UPI 연합뉴스 |
지난 18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의 캐스트로(Castro) 지구. 이 지구 이름을 딴 지하철역을 빠져 나오자, 바로 앞에 보이는 큰 사거리에서 페인트칠 작업이 한창이었다. 네명의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이 LGBTQ+(레즈비언·게이·바이섹슈얼·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를 통칭하는 약어)를 상징하는 무지개색 여섯 가지 색상을 아스팔트 바닥에 촘촘히 그려넣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시 남서쪽에 위치한 캐스트로 지구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LGBTQ+ 커뮤니티 중 하나다. 1917년 미 해군이 동성애자 축출 제도를 도입한 이후 군에서 강제 제대한 병사들이 이곳으로 모여들며 형성됐다. 캐스트로는 1977년 샌프란시스코 시의원에 당선된 하비 버나드 밀크(1930~1978)의 정치적 뿌리이기도 하다. 그는 미국 최초의 동성애자 커밍아웃 정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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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캐스트로 지구에서 비영리단체 캐스트로 지역사회 복지 지구의 일원들이 아스팔트 바닥을 무지갯빛으로 칠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이서희 특파원 |
LGBTQ+의 표식과도 같은 무지개 깃발은 1978년 이곳 캐스트로 지구에서 탄생했다. 미 육군 출신 예술가이자 밀크의 친구였던 길버트 베이커는 그해 샌프란시스코 프라이드 퍼레이드(성소수자 자긍심 행진)를 앞두고 "LGBTQ 커뮤니티만의 고유한 상징이 필요하다"는 요청에 무지개 깃발을 디자인했다. 애초에는 핫핑크와 청록색까지 8개 색으로 구성돼 있었다. 그러나 염료 부족 문제로 핫핑크가 빠지고, 이후 청록색도 파랑색과 통합되며 현재의 6개 색상이 됐다. 다양한 색상이 조화를 이루는 무지개를 통해 길버트는 성적 다양성과 포용성을 표현하고자 했다.
캐스트로 지구 사람들의 무지개 깃발에 대한 자긍심은 그래서 남다르다. 연중 캐스트로 지구 곳곳에서는 다양한 크기의 무지개 깃발을 볼 수 있다. 다양한 국적의 방문객이 몰려드는 6월 '프라이드 먼스(Pride Month·성소수자 인권의 달)'에는 특히 많은 무지개 깃발이 나부낀다. 캐스트로 지구 주민, 사업주 등이 만든 비영리단체 캐스트로 지역사회 복지 지구(CBD) 일원들이 약 2주 전 역 앞 바닥에 무지개를 입히는 작업을 시작한 이유다. CBD 소속으로 방문객들에게 캐스트로 지구 정보 등을 제공하는 자원봉사자 마이클 미센티는 "프라이드 먼스를 기념하기 위해 우리 중 한 명이 아이디어를 냈다"며 "앞으로 이 지구를 찾는 사람들은 이 대형 무지개를 가장 먼저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지워지면 또 칠할 것"이라며 "캐스트로의 무지개는 영원하다"고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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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캐스트로 지구에서 비영리단체 캐스트로 지역사회 복지 지구 소속 자원봉사자 마이클 미센티가 한국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이서희 특파원 |
프라이드 먼스는... 차별 향한 저항의 역사
6월은 캐스트로 지구를 넘어 샌프란시스코 전체의 축제다. 매년 이달 시 전역은 무지갯빛으로 물든다. 프라이드 퍼레이드, 콘서트, 전시, 커뮤니티 모임 등 다양한 문화 행사가 한 달 내내 열린다. '성소수자의 세계 수도'로도 불리는 샌프란시스코의 사람들에게 프라이드 먼스는 축제 그 이상의 의미로도 여겨진다. 억압과 차별에 대한 저항의 역사이자, 존재 자체를 부정당했던 이들에 대한 연대와 지지의 상징이다.
그러나 올해 6월의 분위기는 좀 다르다. 지난 1월 출범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반(反)다양성 기조 영향이다. 트럼프 행정부에 밉보이고 싶지 않은 기업들은 프라이드 퍼레이드 등에 대한 후원을 대폭 축소했다. 샌프란시스코가 받은 타격이 특히 크다. 내년 이후에도 명맥이 이어질 수 있을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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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시청 앞 광장에 6월 프라이드 먼스를 맞아 시가 설치한 무지개 깃발들이 나부끼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이서희 특파원 |
LGBTQ+, 샌프란에 4900억 경제효과
샌프란시스코 프라이드 먼스의 하이라이트는 1972년부터 6월 마지막 주말마다 열리고 있는 대규모 퍼레이드다. 미국 대부분 대도시에서 비슷한 시기 퍼레이드가 열리지만, 샌프란시스코의 퍼레이드의 규모가 뉴욕과 더불어 가장 크다. 퍼레이드는 시 중심의 마켓 스트리트 약 2㎞를 따라 장장 6시간 동안 진행된다. 매년 100만 명 안팎의 사람들이 퍼레이드를 보기 위해 이 도시를 찾는다.
규모가 워낙 크다보니 지역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상당하다. 샌프란시스코 관광청 등에 따르면 6월 샌프란시스코의 호텔 점유율은 85% 정도다. 54% 정도인 다른 달에 비해 월등히 높다. 특히 퍼레이드 기간 시내 중심의 숙박 업소는 한 달 여 전부터 동난다. 마켓 스트리트와 캐스트로 지구 주변의 식당, 카페, 술집 등은 6월 한 달 동안 휴일 없이 운영된다. 이 기간 매출은 다른 달 대비 2~3배 증가한다. 2015년 샌프란시스코시는 프라이드 문화가 도시에 연간 약 3억5,700만 달러(약 4,900억 원)의 경제적 효과를 미치는 것으로 분석했다. 이 가운데 상당 부분이 6월에 발생하는 것으로 시는 추정했다.
이 때문에 기업들도 앞다퉈 샌프란시스코 퍼레이드를 후원해 왔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시에서 배정한 예산과 LGBTQ+ 커뮤니티와 비영리단체 등의 자원봉사로만 운영됐으나, 2010년대부터는 대기업 후원이 운영비의 대부분을 차지해 왔다. 샌프란시스코 인근에 본사를 둔 애플, 구글, 메타, 세일즈포스 등이 공식 파트너로 참여했고, 유나이티드항공, 컴캐스트, 딜로이트 등도 수백만 달러를 후원했다. 2019년 프라이드 퍼레이드에는 약 270개 기업 및 기관이 공식 후원사로 이름을 올렸다. 이에 따라 행사 예산도 300만 달러가 넘을 정도로 풍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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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캐스트로 지구의 한 건물에 '희망은 결코 침묵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붙어 있다. 미국 최초 성소수자 정치인 하비 밀크의 명언이다. 건물 위에는 무지개 깃발들이 나부끼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이서희 특파원 |
샌프란 프라이드 행사, 예산 10% 결손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 재집권으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샌프란시스코 프라이드 조직위원회는 "올해 예산이 약 20만~30만 달러(약 2억7,400만~4억1,100만 원) 부족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이는 전체 예산의 10%가 넘는 액수라고 한다. 6월 전후 무지개 색상 신상품이 시장에 대거 쏟아져 나와 '기업들이 프라이드 먼스를 과도하게 상업적으로 이용한다'는 비판이 거셌던 지난해까지와는 정반대가 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재취임 직후 남성과 여성 두 개의 성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하고, 연방 정부기관의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프로그램을 모두 폐기했다. 이에 따라 기업들도 트럼프 행정부와 마찰을 빚지 않기 위해 자체 DEI 프로그램을 없애는 등 거리두기에 나서고 있다.
그 여파로 오랜 기간 샌프란시스코 프라이드 행사를 후원해 오던 컴캐스트, 안호이저-부시(맥주 제조사), 닛산, 디아지오 등이 명확한 이유를 밝히지 않고 올해 후원을 철회하거나 축소했다. 수잔 포드 조직위 집행이사는 "새 정부 기조가 기업들의 후원 여부 결정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며 "물론 정확한 이유는 단정할 수 없지만, 지금은 (기업들이) LGBTQ+ 권리를 지지한다고 밝히는 것조차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영국 가디언에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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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 30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도심에서 관람객들이 무지개 깃발을 들거나 두르고 프라이드 퍼레이드를 지켜보고 있다. 샌프란시스코=AP 연합뉴스 |
프라이드 행사 후원 축소는 미국 전역에서 이뤄졌다.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도 방산업체 부즈 앨런 해밀턴 등 일부 연방정부 계약 업체들이 "지지 철회는 아니지만 후원은 부담스럽다"며 프라이드 퍼레이드 후원을 철회했다. 콜로라도주 덴버에서는 올해 기업 후원금이 지난해 대비 62%나 줄었다. 덴버 인근 도시인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프라이드 퍼레이드는 대기업이 아닌 풀뿌리 후원이 예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데도 올해는 전년보다 후원금이 최대 1만 달러가량 감소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런 분위기는 다른 나라까지 확산하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영국의 프라이드 축제 기획 네트워크인 UKPON은 올해 지역 프라이드 행사 조직위원회 중 약 75%가 "기업 후원 축소를 겪었다"고 밝혔으며 이 중 25%는 "후원금이 절반 이상 줄었다"고 했다고 전했다. 이에 대부분 예산을 기업 후원에 의존해 왔던 일부 프라이드 행사는 개최가 취소되거나 불투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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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시내에 6월 프라이드 먼스를 맞아 시가 설치한 무지개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이서희 특파원 |
"모든 기업 찾아서라도... 행사 이어갈 것"
예산의 감소는 행사 규모 축소뿐 아니라 행사 참여자들의 안전 위협으로도 이어진다. 프라이드 퍼레이드는 참여자와 지지자들만큼이나 많은 반대자가 몰린다. 충돌 위험성이 큰 만큼 보안과 경호, 의료 시설과 인력이 필요한데, 예산이 줄면 간접 운영비에 속하는 이런 비용부터 줄여나갈 수밖에 없다고 한다.
샌프란시스코 프라이드 퍼레이드의 경우 몇 달 전부터 '예산 부족 탓에 제대로 열리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가 나오며 개인 소액 기부자들의 기부가 최근 증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사회적 분위기라면 내년 이후의 정상 개최는 장담하기 어렵지 않겠느냐는 걱정이 많다. 포드 이사는 "프라이드 문화는 원래부터 위태로웠고, 앞으로는 더 그럴 수밖에 없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행사를 반드시 열어갈 것이다. 모든 기업의 문을 두드려서라도 필요한 자금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샌프란시스코= 이서희 특파원 sh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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