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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이 2025년 6월17일(현지시각) 캐나다 앨버타주 캐내내스키스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장에서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와 한-일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이재명 정권은 역시 ‘주류’를 지향하는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 통치를 포기한 보수세력이 비워놓은 자리를 확실하게 점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진보’ 혹은 ‘피플파워’를 자처했다면 아무래도 망설여졌을 공간에 거침없이 발을 들이는 모습을 보면 더욱 그렇다.
이스라엘의 기습적 이란 침공에 따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변덕으로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한-미 정상회담은 무산됐지만, 취임 10여 일 만에 이뤄진 이재명 대통령의 정상외교 행보는 무난함 그 자체였다. 뭔가 이례적 행보가 나오길 이제나저제나 기다린 보수언론의 기대가 무색해질 정도였다.
한-일 협력 미 대응하며 실리 추구
보수언론의 기대는 ‘친중·친북 감별’ 시도와 맞닿아 있다. 이들은 우선 이 대통령이 어느 정상과 먼저 통화할지에 주목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이 먼저였다면 이들은 이재명 정부를 ‘친중·반미 정부’로 몰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와 우선 통화했다. 조선일보는 “첫 단추를 잘 끼웠다고 평가한다”(2025년 6월10일 사설)고 했다. 다음으로 이들은 이 대통령이 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할지를 주시했다. 불참한다면 이 역시 비주류적 편향으로 규정할 태세였다. 그러나 대통령실이 참석 쪽으로 기울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보수언론의 ‘감별’ 시도는 다소 김이 샜다.
외교·안보 노선이 주류에 가깝게 된 것에는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의 역할이 있었을 것이다. 이 대통령이 위성락 실장과 이종석 국가정보원장 후보자를 선택했을 때 보수언론은 해묵은 ‘동맹파 대 자주파’ 갈등을 떠올렸다. 이 구도는 국가안보실 1, 2, 3차장 인사에 속도가 붙지 않으면서 이종석 후보자를 중심으로 한 자주파 인사들이 위성락 실장과 가까운 인사들의 임명을 반대한다는 설이 퍼지는 것으로 이어졌다. 조선일보는 이 사안을 오광수 민정수석의 낙마와 묶어 ‘정체성과 선명성을 둘러싼 여권 내 파워게임의 결과’란 시각으로 전했다.(6월14일) 하지만 결과를 보면 국가안보실 인사는 역시나 위성락 실장이 주도한 형태다. 외교·안보의 큰 그림에선 주류 노선인 동맹파가 주도하는 게 명백하다.
이재명 정권의 이런 태도에는 우선 변화된 대외 환경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정권 초기의 한-일 관계는 늘 과거사 문제에 대한 태도부터 쟁점화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비상식적 ‘관세전쟁’ 시도에 한국과 일본이 함께 대항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당장 손잡아야 할 현안이 생기면 다른 쟁점은 아무래도 뒷순위에 놓이게 된다. 미국과 일본이 손잡고 한국을 압박하던 기존 안보 구도 역시 트럼프 행정부의 특이성 덕분에 다소 희석됐다. 이 덕분에 한-일 관계와 한·미·일 관계에서 이재명 정권의 선택지는 오히려 넓어졌다.
부동산 정책도 ‘세금 아닌 공급’ 고수
물론 이것만으로 이재명 정권의 ‘주류화’와 ‘중도화’를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이 흐름은 외교·안보 영역을 넘기 때문이다. 가령 최근 서울 부동산 시장의 과열 조짐이 앞다퉈 신문 지면을 장식하는 상황을 보자. 전문가들은 서울시 일부 지역에 대한 토지거래허가 해제 이후 확대 지정 등 이전 정권 시기 형성된 조건에 더해 대출규제를 앞둔 시점에서의 막차 수요, 새 정부에 대한 기대감 등이 반영돼 일어난 현상으로 본다.
여기서 새 정부에 대한 기대감이라는 대목에는 이 대통령이 후보 시절 ‘세금으로 집값 잡지 않겠다’ ‘공급으로 대응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 역시 포함된다. 이는 부동산 정책에 대해 주류가 내세우는 대표적 해법이다. 하지만 신도시 조성, 재개발·재건축 활성화 등 ‘공급’이라는 분류에 들어갈 만한 대책은, 단기적으로 기대심리를 불러일으켜 집값 상승에 기여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오히려 ‘공급만능론’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시민단체 등을 통해 강하게 제기될 정도다.
그럼에도 이재명 정권이 ‘세금이 아닌 공급’을 고수하는 이유는 뭘까? 주지하다시피 그것은 문재인 정권의 기억 때문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 당시 여당이던 더불어민주당을 포함한 모든 이해관계자가 문재인 정권의 부동산 정책 실패를 ‘이념적 편향에 빠져 세금으로 집값 잡으려 한 데 따른 후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즉, 문재인 정권의 부동산 정책은 ‘실패한 진보’의 상징 중 하나다. 이 덕에 이재명 정권은 ‘탈진보’, 즉 ‘주류화’와 ‘중도화’를 감행할 수 있는 거다.
이 도식은 이 대통령 본인이 직접 피해를 호소하는 정치검찰에 대한 개혁(물론 이 주제도 깊게 들어가면 비슷한 시각에서 분석할 대목이 없지 않다)과 국민추천제와 국민 정책 제안 등 특유의 스타일에 근거한 정책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영역에 걸쳐 적용할 수 있다. 이게 가능한 근본적 이유는 다수 유권자가 앞서 도식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인사 원칙 후퇴 귀결 가능성도
가령 과거 박근혜 탄핵 국면에서 유권자들은 ‘이명박근혜’ 정권과는 완전히 디엔에이(DNA)를 달리하는 새로운 정권을 탄생시키는 것이 나라를 정상화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적폐청산’은 그 요구가 반영된 구호였다. 그러나 윤석열 탄핵 이후 다수 유권자는 적어도 민주주의 기본을 지키는 정권이 탄생하는 것만으로도 나라가 정상화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첫째는 윤석열 정권이 상상 이상으로 무도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종료된 지 불과 3년 지난 문재인 정권이 ‘지나치게 진보 편향적이어서’ 문제였다는 인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탄탄대로일까? 그렇지는 않다. 이재명 정권이 택한 길에도 함정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인사 원칙이다. 현재와 같은 방식의 주류화는 ‘진보 특유의 결벽증을 버리자’는 식의 인사 원칙 후퇴로 귀결될 가능성이 있다. 과거 같았으면 사퇴했을 공직 후보도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보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앞서 본 정책적 차별화가 어려워지는 문제와 더불어, 보수정부와 대비되는 민주정부의 비교우위를 ‘능력’ 문제로 한정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재명 정권이 ‘유능’할 수 있는 기간에는 이 조건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5년 단임 대통령제의 한국 정치적 맥락에서 정권이 5년 내내 ‘유능’한 상태를 유지하기는 어렵다. 이재명 정권이 더는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지 못하게 될 때 보수정치는 ‘그래도 보수의 정책과 가치가 옳다는 것을 민주정부도 인정했다’는 식의 논리로 부활을 시도할 것이다.
이 시기에 퇴행하지 않으려면, 바로 이때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진보 지향 정치가 실체를 갖고 존재해야 한다. 주류를 지향하는 이재명 정권은 역설적이게도 이런 방식으로 진보적 가치의 필요를 증명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런 예고된 미래를 맞아 ‘진보’는, 민주당 혹은 보수정치와의 거리가 아닌, 자신만의 내용으로 평가받을 준비가 돼 있는가?
김민하 정치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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