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살롱] 사라지는 여성학과
1990년에야 국내에 여성학과 만들어져
첫 여성학 박사 논문, 성차별적 일터 조명
계명대 대학원 여성학과 폐지 문제 확대
"표준 남성 위주 '보편' 해결책 수명 다해"
여러 분야서 젠더 관점 연구 필요성 높아
남성들도 육아휴직을 쓰고 아이와 함께하는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사·육아를 전담해야 하는 여성의 고통, 그래서 꿈과 경력을 버려야 했던 여성들이 오랫동안 싸워온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페미니즘, 즉 여성주의의 본질은 남성들도 '성역할'의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함께하는 길이죠.
'국내 1호 여성학 박사'인 정영애 전 여성가족부 장관이 1997년에 출간한 이화여대 박사학위 논문을 들춰봤어요.
"가정과 직장의 요구와 의무를 모두 충족시켜야만 하는 대부분의 조직 내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일에 대한 헌신도 및 시간 투자, 책임감, 적극성이 뒤떨어지는, 따라서 회사에 이윤을 주기보다는 그냥 평균치에 그쳐 환영받지 못하는 조직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90년에야 국내에 여성학과 만들어져
첫 여성학 박사 논문, 성차별적 일터 조명
계명대 대학원 여성학과 폐지 문제 확대
"표준 남성 위주 '보편' 해결책 수명 다해"
여러 분야서 젠더 관점 연구 필요성 높아
편집자주
한국일보 기자들이 직접 여러 사회 문제와 주변의 이야기를 젠더적 관점에서 풀어냅니다. '젠더, 공간, 권력' 등을 쓴 안숙영 계명대 여성학과 교수의 글도 기고로 계속 함께 합니다.![]() |
계명대는 정책대학원을 폐원하면서 여성학과를 사회학과의 세부 전공으로 흡수하기로 결정했다. 계명대학교 여성학과 지키기 공동대책위원회 회원 20여 명이 지난달 8일 대구 달서구 계명대 성서캠퍼스 본관 앞에서 일반대학원 여성학과 신설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대구=김재현 기자 |
남성들도 육아휴직을 쓰고 아이와 함께하는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사·육아를 전담해야 하는 여성의 고통, 그래서 꿈과 경력을 버려야 했던 여성들이 오랫동안 싸워온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페미니즘, 즉 여성주의의 본질은 남성들도 '성역할'의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함께하는 길이죠.
'국내 1호 여성학 박사'인 정영애 전 여성가족부 장관이 1997년에 출간한 이화여대 박사학위 논문을 들춰봤어요.
"가정과 직장의 요구와 의무를 모두 충족시켜야만 하는 대부분의 조직 내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일에 대한 헌신도 및 시간 투자, 책임감, 적극성이 뒤떨어지는, 따라서 회사에 이윤을 주기보다는 그냥 평균치에 그쳐 환영받지 못하는 조직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성적 자질이나 능력에 대한 필요에 의해 여성을 받아들였던 조직도 시간이 경과해 점차 기혼 여성, 특히 어머니인 여성이 늘어가는 상황, 그리고 이들이 직면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오직 우려와 기피의 대상으로 여길 뿐이다."
특히 △아버지 근로자 응답자 70%의 하루 자녀 돌봄 시간이 1시간 미만이었다거나 △육아휴직 이용자의 94.3%가 여성이었다는 통계를 보면, 이런 연구들이 쌓여서 그나마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나라 첫 여성학 박사 논문('생산 중심적 조직 내의 성별관계: 공식부문 경력 여성을 중심으로')을 들춰본 이유는, 사회 진보에 필수적인 여성학이 점점 자리를 잃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35년밖에 안 된 국내 '여성학과' 역사
![]() |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전경. 뉴스1 |
놀랍게도 국내 여성학과의 역사는 35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최초는 1990년 이대 대학원에 개설된 여성학과(박사과정)였어요. 이때 여성학 공부를 시작해 1997년 학위를 취득한 정 전 장관은 수년 전 한 매체 인터뷰에서 '1호 여성학 박사'라는 수식어에 대해 "제일 먼저 들어가 제일 먼저 나온 것일 뿐"이라고 겸손하게 언급하기도 했지요.
이대 여성학과가 생긴 때와 같은 해, 비수도권에선 계명대가 여성학대학원을 별도로 설립해 학생들을 모집했습니다. (2010년 여성학대학원이 사라지면서 오늘날의 정책대학원 여성학과가 됐죠.) 이후 90년대 중후반에 걸쳐 타 대학들에서도 여성학 과정이 생겨났어요. 다만 모두 다른 학과와의 연계 전공이나 협동과정 위주였고, 학과를 독자적으로 두지는 않았습니다.
그나마 여대를 중심으로 만들어져 있던 여성학 과정은 200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모두 폐지 수순을 밟았어요. 2004년에 서울여대가 처음으로 여성학 협동과정을 없앴고, 1997년부터 여성학 협동과정을 운영했던 숙명여대도 2008년 이를 폐지했어요. 성신여대 여성학 연계전공 역시 2017년을 끝으로 사라졌습니다.
그 결과 2025년 기준 우리나라에 여성학 협동과정을 포함해 여성학 전공이 설치돼 있는 대학·대학원은 7곳(계명대·부산대·서강대·서울대·성공회대·이화여대·충남대)이 전부예요. 그중에서도 '여성학과'라는 명칭으로 독립적으로는 운영되는 곳은 이대와 계명대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세계 최악의 유리천장(여성 승진) 지수, 성별 임금격차의 현실은 여전한데, 여성학은 신입생이 줄고 오히려 힘을 잃어가는 것이 아이러니지요. 어쩌면 차별적 현실과 페미니즘 백래시(반발)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겠네요.
계명대마저 폐지 목전···"여성주의적 해결책 모색 필수"
![]() |
계명대 정책대학원 여성학과 홈페이지. 홈페이지 캡처 |
그런데 최근 계명대 여성학과마저 사라질 위기에 놓였어요. 지난해 계명대 본부가 신입생 감소에 따라 정책대학원을 폐원하기로 하면서 올해 신입생 모집을 중단했고, 여성학과를 사회학과의 세부 전공으로 흡수하기로 결정한 것이죠. 여성학과는 일반대학원의 독립된 학과로 승계·개설할 것을 요구했지만 대학은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이에 계명대학교여성학과지키기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는 강하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공대위는 지난달 8일 기자회견을 통해 "계명대 여성학과는 35년간 지역 유일 여성학 교육을 담당한 공간"이라며 "사회학과로의 통합은 여성학의 독자성과 철학, 역사, 전통을 인정하지 않고 학생들의 학습권을 침해하는 중대 사안"이라고 비판했죠.
연관기사
• 계명대 '비수도권 유일' 여성학과 통폐합 방침에 학생·학계 반발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50813180002783)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5050813180002783)
이현재 서울시립대 인문학연구소 교수는 여성학과의 필요성을 이렇게 말합니다. "인문학이 인간에게 필요하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인간 존재·정서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학문이기 때문이죠. 여성학 역시 여성 문제만 다루는 게 아니에요. 젠더 연구를 통해 성이라는 인간의 존재론적인 조건을 핵심으로 다루는 학문으로, 인간 사회에 필수적이죠."
![]() |
5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한국여성노동자회와 전국여성노동조합 조합원들이 노동 분야 성평등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여성의 비정규직 비율은 남성에 비해 월등히 높다. 뉴스1 |
사회 문제가 더욱 복잡해지는 시대에 여성학과를 오히려 확대해야 한다는 진단도 나옵니다. 김현미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여성학과 큰 연관이 없을 것 같은 산업·범죄 등 여러 분야의 문제 해결에도 여성학은 핵심이 될 것"이라고 했어요. 예컨대 남성 중심의 산업 유해·안전 기준에 여성을 반영해 노동자 보호와 인력 활용을 높이고, 고도화되는 여성 범죄에 신속하게 대처하는 식으로요.
앞서 '1호 여성학 논문'을 통해 남성중심주의가 뿌리 깊은 일터 문화를 진단하고 여성친화적으로 개선해나갈 수 있게 된 것도 여성학과의 성과겠지요. 성차별적 일터에 대한 여성주의적 연구가 있었기에, 그보다 먼저 여성학과가 만들어져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니까요.
김 교수는 끝으로 힘주어 말했습니다. "이제는 '보편'이라고 여겨졌던 '표준 남성' 단위의 해결책, 발전주의적 관점으로는 한계가 명확해요.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모든 사회 현상에 정교하게 접근해야 할 때인 만큼 여성학과는 더 이상 없어져선 안 됩니다."
최은서 기자 silver@hankookilbo.com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