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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글쓰기를 열어주는 동그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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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는 이야기] 글쓰기를 열어주는 동그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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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예전에 방영됐던 TV 드라마를 다시 본다. 구체적으로 1990년대의 드라마들인데, 고맙게도 동영상 플랫폼에 회차별로 공개돼 있어 어렵지 않게 감상할 수 있다. 어린 시절 내 감수성을 키워준 것은 그 드라마들이었다. 지금도 나는 소설을 쓰기 전 내가 표현하고픈 이미지를 다듬어갈 때 당시 봤던 드라마의 기억을 되짚곤 한다. 얼마 전엔 '개성이 뛰어난 캐릭터들이 한데 모여 사회의 부조리함에 저항하는 이야기'를 생각하다 문득 어릴 때 봤던 드라마 '임꺽정'이 떠올랐다. 아, 그때 백두산에서 축지법을 썼던 인물이 누구였더라? 꺽정이와 같이 천민 계급에 속했던 갖바치가 어떤 도술을 부렸지?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다가 나는 소설 '임꺽정'을 읽게 됐다. 영상이 아닌 글로 묘사된 이야기를 읽으며 그때 나를 사로잡았던 환상과 정서를 다른 방식으로 느꼈다. 어쩌면 글쓰기란 그렇게 유년에 파놓은 샘물을 찾아가는 여정이 아닐까. 샘터로 돌아가는 우여곡절과 그때의 물을 다시 마시고픈 열망이 우리가 이야기에서 기대하는 아름다움이 아닐까.

음악을 듣는 일도 소설을 위한 여행에 좋은 동무가 된다. 저마다 일할 때 즐겨듣는 노동요가 있듯 나도 글을 쓸 때면 그에 어울리는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 잔잔한 배경음악으로 삼는다. 클래식이나 가사가 없는 연주곡일 때도 있지만, 요즘엔 80년대 음악에 마음이 향한다. 주로 내가 태어났을 무렵의 유행가들. 내가 아직 말과 글을 몰랐을 때 어쩌면 엄마의 뱃속에서 얼핏 들었을 노래들을 찾으며 내 살과 뼈에 흡수된 무의식의 음악에 다가간다.

그때는 가요제의 수상곡이 인기가 많았는지, 당시 영상을 보면 더벅머리의 젊은이들이 밴드나 그룹으로 뭉쳐 자작곡을 부르는 모습이 많다. 신시사이저 멜로디와 무척이나 서정적인 가사, 그리고 자연스러운 율동이 인상적이다. 영상이 있는 곳에는 노래와 얽힌 사람들의 추억담이 댓글로 달려 있다. 하나하나의 에피소드가 어찌나 생생하면서도 애잔한지, 구태여 작위적인 사건을 끼워 넣지 않아도 이미 흥미진진한 드라마다.

하지만 과거를 되짚는 마음이 아련한 향수를 위한 것만은 아니다. 지금 이 시대가 예전만 못하다거나 지나간 한때를 이상향으로 두고 그 시절의 갈등을 보기 좋게 채색하고픈 마음도 없다. 오히려 나는 미래를 엿보는 호기심으로 과거를 기웃거린다. 일기에 기록된 누군가의 변치 않는 습관처럼, 내가 사는 공동체의 기억을 꺼내본달까. 그날의 기쁨과 슬픔이 일기에 담기듯 흘러간 드라마와 노래에는 그 시절의 정서가 짙게 어려 있다. 그리고 그 느낌들은 마치 동그란 궤도를 돌듯 주기를 반복하며 현재로 되돌아온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와 음악이 하나로 이어지는 커다란 원을 상상해본다. 바다에서 증발한 수증기가 구름으로 응결해 비가 되어 다시 지상에 내려오는 자연의 사이클처럼. 어쩌면 내가 돌아가는 유년의 샘터는 나라는 지점에 고인 누군가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야기를 읽고 음악을 듣는 일은 그 연결의 느낌을 일깨운다. 잊지 못할 장면과 입가에 맴도는 멜로디로 공감이라는 신비의 길을 연다. 인체를 이루는 원소뿐 아니라 마음과 정신 또한 우주의 빅뱅처럼 같은 기원에서 비롯된 닮은꼴이라는 걸 깨닫는다.

나는 소설을 쓰면서 지나온 미래로 향해간다. 결국 같은 지점으로 회귀하는 고단한 여정이라 해도 더 멀리, 더 천진하게 발걸음을 내디딘다. 유년의 샘물이 얼마나 맑고 시원한지 알기 위해선 청년과 장년을 지나 내게 주어진 시간을 빠짐없이 통과해야 할 테니 말이다. 오래 기억에 남는 여행이 그렇듯 글쓰기 또한 헤매고 더듬거려야 비로소 출발점으로 귀환하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지 않을까.

[김멜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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