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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학 프리즘투자자문 대표 |
서구의 한 경제학자가 개발도상국을 방문했을 때 언덕길에서 사람이 줄줄이 붙어 트럭을 밀고 있었다. 그는 물었다. "왜 엔진을 고치지 않고 사람을 동원합니까." "일자리가 많아지니까요. 실업문제도 해결되고요." 그러자 그 경제학자는 "하지만 그건 일자리가 아니라 비효율을 유지하는 겁니다."
이 장면은 마치 한국 경제를 꼬집는 비유처럼 보인다. 고장 난 성장엔진은 방치한 채 트럭을 사람들이 밀고 있다. 당장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탈진할 뿐이다.
지금 한국 경제의 본질적 위기는 성장동력의 고갈이다. 물론 분배와 복지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지속 가능하려면 그 재원을 만들어낼 생산성과 혁신이 뒷받침돼야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이다. 버블붕괴 이후 일본은 정부지출과 양적완화를 반복했지만 TFP(Total Factor Productivity·총요소생산성)는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실제로 일본의 TFP 연평균 증가율은 1990~2020년 0.3% 내외에 머물렀고 미국의 1.0%에 한참 못 미쳤다. 혁신부진과 구조개혁 지연이 결국 잠재성장률을 0.6%까지 끌어내렸다. 이는 '성장 없는 분배'가 얼마나 허약한 기반 위에 놓이는지를 상징한다.
한국의 노동시간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수준이다. 2023년 기준 연간 평균 1872시간으로 독일(1340시간)보다 532시간이나 더 일한다. 그러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53달러로 OECD 38개국 중 33위에 머문다. 선진국 중 사실상 최하위다. 오래 일하지만 효율은 낮은 이 모순이 구조적 문제의 핵심이다. 생산성은 단순히 노동시간이 아니라 자본의 질, 기술수준, 조직역량으로 결정된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TFP의 정체다. 2000년대 초반 연 1.9% 수준이던 TFP 증가율은 2010년대 이후 0.7%대로 반 토막 났다. 한국개발연구원(KDI)과 한국은행 분석에 따르면 최근 잠재성장률 하락의 가장 큰 원인은 TFP 둔화며 2024년 기준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1.9%에 그쳤다. 복지지출은 늘어나지만 이를 떠받칠 성장의 엔진은 멈춰가는 것이다.
이 흐름을 되돌릴 유일한 열쇠는 기술혁신과 스타트업 등 산업구조 개편이다. 독일의 경우 프라운호퍼연구소, 지멘스 등 기업과 정부·학계가 참여하는 '인더스트리 4.0'을 통해 고부가 제조업의 디지털화를 이끌고 있다. 일본은 '커넥티드 인더스트리' 전략으로 IoT(사물인터넷)와 AI(인공지능) 기반 제조혁신을 추진 중이며 이는 고령화와 저성장 문제를 돌파하기 위한 국가적 기술투자 계획이다. 이들 국가는 지속 가능한 생산성 혁신정책을 유지하며 기술 중심의 고부가가치 산업을 육성해 경제의 질적 전환을 꾀한다.
새로운 정부가 진정한 전환을 원한다면 먼저 복지보다 혁신을 말해야 한다. R&D 예산은 AI·양자·배터리·우주 등 선도기술 등에 성과 중심으로 재편돼야 하며 딥테크 기반 스타트업을 국가전략산업으로 육성해야 한다. 산학연 협력과 개방형 혁신 플랫폼을 제도화하고 노동시장 유연화를 병행해 혁신기업들이 인재를 적기에 확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분배는 필요하다. 하지만 분배는 열매를 나누는 일이고 열매는 성장이라는 나무에서 나온다. 지금 이 시점에 필요한 것은 더 강한 성장의 엔진이다. 이제 트럭은 그만 밀자.
이윤학 프리즘투자자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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