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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가 간과한 것…이민 정책이 실패하는 이유 [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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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가 간과한 것…이민 정책이 실패하는 이유 [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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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가 미국을 만들었다!’ 2025년 6월9일 켄터키주 루이빌에서 시민들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강압적인 이민자 단속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이민자가 미국을 만들었다!’ 2025년 6월9일 켄터키주 루이빌에서 시민들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강압적인 이민자 단속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장영욱 |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위원





박사 과정 때 옛소련 지역의 민족별 이주 행태를 연구했다. 내가 학위를 한 경제사학과에서는 첫번째 지도교수로 경제학 전공자를, 두번째 지도교수로 사학 전공자를 배정해줬다. 주로 숫자와 모형으로 세상을 이해하던 내게 첫번째 지도교수와 면담은 비교적 익숙했다. 문제는 두번째 지도교수였다. 소련 인구조사표에서 찾은 민족별 통계를 분석해 간 날, 이분은 대뜸 내게 “민족의 정의가 도대체 뭐냐”고 물으셨다. ‘한민족’으로서 정체성을 의심해본 적 없는 나는, 아마도 ‘민족’을 오래전에 정해져 변하지 않는 개념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교수님의 지도에 따라 영속주의니, 현대주의니, 종족상징주의니 하는 ‘민족의 형성’에 대한 다양한 이론을 접한 다음에야 내가 쓰는 통계의 의미를 깨닫기 시작했다. “소련인”이 아닌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카자크인으로 불렸던 사람들이, 자기 민족의 이름을 딴 공화국 안에서 정체성을 지키며 살았던 이유, 그들 중 상당수가 자기 땅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다가 소련이 무너진 뒤 다시 돌아온 이유는, 숫자와 통계만 봤으면 아마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두 지도교수 아래 정량적 연구 방법론을 정교하게 다듬는 동시에 숫자 이면의 삶을 더 깊이 고찰할 기회를 얻었던 건 큰 행운이었다.



올해 직장에서 이민 과제를 하면서 그때 생각이 났다. 경제연구원 특성상 주로 통계를 활용해 ‘노동력으로서 이민자’를 분석한다. 이들은 언어능력, 학력, 숙련도, 체류 기간에 따라 우리나라에 필요한 인력과 필요 없는 인력으로 나뉜다. 이민자들이 한국에 머물 수 있는 기간과 활동 범위는 그들이 지닌 비자가 정해준다. 어떤 이는 합법 체류자로, 어떤 이는 불법 체류자로, 어떤 이는 난민 또는 인도적 체류자로 분류된다.



그런데 사람은 통계로 간단히 분류하기엔 너무 큰 존재다. 여느 한국인이 그렇듯, 이민자들도 학력, 숙련도, 국적, 민족이라는 경계에 구속받지 않고 삶의 형태를 확장하길 원한다. 단순 노무직으로 들어왔다가도 기술을 배워 전문 인력이 되고 싶을 수 있고, 제조업종에 고용됐다가도 적성에 안 맞아 서비스업으로 이직하고 싶을 수 있다. 이민자 가정의 자녀는 부모 나라의 정체성을 지닌 동시에 한국 사람의 정체성을 지닌다. 그러나 현행 비자와 국적 체계는 이들의 삶의 확장을 허용하지 않는다. 제도의 한계는 종종 이민자를 불법적인 존재로 만들기도 한다. 이민자들은 단지 더 나은 삶을 찾아 터전을 옮기고, 그곳에서 자신의 삶을 성실히 영위하며, 이를 통해 그곳의 발전에 기여했을 뿐인데, 통계에 ‘불법 체류자’로 분류되는 순간 그들 앞에 놓인 운명은 차별과 단속과 추방이다.



삶에 대한 몰이해에 기반한 이민 정책은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트럼프의 이민자 단속이 단적인 예다.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서 오랜 기간 지역에 터 잡고 살아온 사람들이 한순간에 범죄자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트럼프가 간과한 건 이들이 지역경제를 떠받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23년 기준 미국 노동시장에는 약 3천만명의 이주민 근로자가 있으며, 그중 합법적인 체류 자격이 없는 사람이 1200만명이다. 미국 농업 분야 노동자의 15%, 건설업 분야의 14%, 외식업의 8%가 미등록 이주민인데 이들을 다 쫓아내면 경제가 버틸 수 없다. 트럼프가 뒤늦게 농장과 음식점을 단속 대상에서 뺐다지만, 그사이 벌어진 무자비한 단속과 반단속 시위, 군대 파견은 이민자에 대한 낙인과 극심한 갈등이라는 막대한 비용을 초래했다.



우리나라의 외국인 가사관리사 사업은 어떤가. 우리 출생률을 올리기 위해 수입해 오자는 외국인들은 노동력이기에 앞서 사람이다. 싼값에 들여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도구가 아니기에, 적절한 근로환경을 보장해주고 생활이 가능한 수준의 임금을 보장해야 한다. 시범사업을 주도한 서울시가 저임금 모델은 포기하고 장기적인 사회통합 방안을 고안하겠다고 하니 늦었지만 다행한 일이다.



이민자를 통계와 제도에 가두지 않고 무한한 확장 가능성을 지닌 사람으로 대한다면 이민 정책의 실패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이민자들과, 그들과 이웃할 내국인들을 모두 이롭게 하는 정책은 삶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나온다. 새 정부가 할 일이 많겠지만, 과거의 실패를 거울 삼아 제대로 된 이민 정책을 만드는 데도 신경을 써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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