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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스타 사이비의 시대 [똑똑! 한국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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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스타 사이비의 시대 [똑똑! 한국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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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조문서들. 최예린 기자

위조문서들. 최예린 기자




강병철 |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출판인





하버드대학에서 심리학과 뇌과학 전공.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UCLA) 임상심리학 박사. 미국 공인 임상심리학자. 40대 초반의 인기 유튜버이자 베스트셀러 작가. 지난 10일 사망한 김아무개씨의 이력이다. ‘저렇게 우수한 사람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다니!’ 안타까운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력은 죄다 거짓이다. 올해 초 책을 내면서 세계적 심리학자들에게 추천사를 받았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한 데서 꼬리가 밟혔다. 책은 한글로만 출간되었는데, 외국의 유명 심리학자들이 읽었다니 이상하다고 생각한 독자들 사이에서 논문과 학위가 검색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급기야 김씨는 인터넷에서 모든 자취를 지웠고, 곧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그의 책은 손꼽히는 대형 출판사에서 나왔다. 회사는 일이 터진 뒤에야 부랴부랴 “저자의 주요 이력이 상당 부분 허위라는 점, 책에 수록된 추천사 역시 당사자들에게 직접 받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했다”. 출판사는 저자가 “서울시교육청과 대검찰청 등에서 강의를 진행”했다고 한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국내 유수의 출판사와 공공기관이 이토록 어설픈 사기극에 넘어가다니. 대검찰청은 또 뭔가? 이런 사람 잡아가는 곳 아닌가?



2017년 ‘환자혁명’이란 책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조한경씨가 떠오른다. 나는 유사과학을 비판하느라 거의 10년간 이 분야 책들을 읽었는데, ‘환자혁명’은 특히 질이 낮았다. 틀린 내용이 너무 많아 일일이 반박하기 힘들 정도였다. 조씨 역시 학력 위조 의혹에 휩싸였다. 그는 카이로프랙터인데 의사 사칭 논란까지 있다. 그런데도 책은 수십만부가 팔리고, 저자는 수많은 공공기관과 대기업에서 강연했으며, 방송까지 출연했다. 학력이 좋다니까 일부에서 제대로 읽지도 않은 책을 기막힌 명저라고 칭송하는 모습도 똑같다. 몇년 뒤, 미국에서 카이로프랙터로 일하던 조씨는 보험 사기로 면허를 취소당했다. 그런데도 책은 아직까지 베스트셀러이고, 저자는 여전히 유튜브를 통해 그릇된 의학 정보를 퍼뜨린다.



미국의 종합대학이나 내실 있는 단과대학 졸업 여부는 쉽게 알 수 있다. 공식 검증기관이 있기 때문이다. 20달러 미만의 소액만 내면 즉시 인터넷으로 확인해준다. 작은 단과대학(칼리지)은 영리 목적으로 개설된 곳이 워낙 많아 확인하기 어려울 수 있다. 누리집은 그럴듯하지만, 막상 가보면 건물 한두층을 빌려 우리나라 동네 학원 규모로 운영하는 곳도 적지 않다. 전략적으로 이름을 유명 대학과 비슷하게 짓기도 하므로, 언뜻 보면 속기 쉽다. 유럽의 음악원이나 디자인스쿨도 비슷하다고 들었다. 이런 학력을 검증하려면 품을 팔아야 한다. 다각도로 검색해보고, 필요하면 현지인에게 의뢰하는 것이 최선이다.



하긴 확인해볼 생각조차 안 해서 그렇지 방법이 없겠는가? 학력 위조나 학위 사칭을 왜 심각한 범죄로 보지 않는지 알 수 없다. 세상을 속이고, 마땅히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의 몫을 가로채도 잠시 창피를 당하면 그뿐, 몇년 뒤에 멀쩡하게 활동을 재개한다. 그러니 유명 가수나 배우, 대학교수, 작가, 정치인, 심지어 대통령 부인에 이르기까지 비슷한 일이 끊이지 않는다.



부당한 방식으로 이익을 꾀하면 반드시 누군가 피해를 본다. 치료자가 그런 일을 저지르면 그를 신뢰한 사람이 큰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 이번 사건에서 가장 화가 나는 점은 자폐 어린이를 대상으로 고액 상담을 했다는 것이다. 돈 몇푼 벌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을 상대로 파렴치한 사기를 벌이다니.



인공지능(AI)의 시대다. 인터넷에서 그럴듯한 말을 긁어모아 책 한권 뚝딱 쓰는 건 일도 아니다. 알맹이 없는 아름다운 말들, 진짜와 비슷하지만 진짜가 아닌 사이비의 시대가 다가온다. 외국 학력을 내세우려면 먼저 증빙서류를 주고받는 것이 일상화되어야 한다. 이 일을 계기로 아예 공신력 있는 검증기관을 세우면 어떨까?



<‘슈퍼스타 사이비의 시대’ 칼럼에 대한 반론>



미국에서 카이로프랙틱 의료 면허 소지자(Doctor of Chiropractic)는 환자의 상태를 진단하고 소견, 치료를 행하여 보험수가를 받을 수 있는 1차 의료인이다. 진료범위는 각 주마다 다른데 오레곤이나 플로리다, 뉴멕시코와 같은 일부 주에서는 카이로프랙터가 진통제를 처방하거나 수술을 할 수 있고 응급실에서 근무하기도 한다.



수련기간은 총 4700시간, 학부와 대학원(4년)을 마친 후 인턴 과정을 거쳐 Doctor 학위를 수여받고, 4차에 걸친 국가고시를 거쳐 면허를 취득한다.



국내 의료법은 MD(Medical Doctor)만 의료인으로 인정하지만, 미국에는 MD 외에도 DC(카이로프랙터), DO, ND, DPM 등 다양한 학위의 전문 의료인들이 1차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



미주 한인 커뮤니티에서는 카이로프랙틱 전공을 ‘척추신경과’로 통칭한다.



조한경 | ‘환자 혁명’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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