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설에서 나온 중증 장애인들의 표정이 밝다. 노숙 농성 둘째날인 2009년 6월5일 오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거리 홍보를 하던 방상연(왼쪽)씨와 홍성호씨가 밝은 표정으로 얘기를 하고 있다. 방씨는 “밖에 나오니 몸은 더 힘들지만 자유가 있어 좋다”고 말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
인권운동을 하면서 장애인 시설 문제를 접하게 된 것은 1996년부터 시작된 평택의 에바다 투쟁이나 1998년의 양지마을 사건으로부터였다. 우리 사회에 사회복지법인들이 운영하는 수용시설(요즘은 주거시설로 부른다)의 인권침해가 매년 몇건씩 충격적으로 보도되던 때였다. 앞의 두 사건에 깊이 관여하게 되면서 내가 속해 있던 인권운동사랑방에도 시설에서 일어나는 인권 침해에 대한 제보가 들어왔다.
2003년 10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인권센터와 내가 속해 있던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들은 충남 연기군의 ‘은혜사랑의집’을 공동으로 조사했다. 철문 두개를 열고 들어가니 ㅁ자의 마당을 가운데에 두고 수십개의 방이 빙 둘러 있었다.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있고, 옥상에는 감시초소가 있었다. 서너평의 방에 5~6명이 생활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방마다 곰팡이 냄새가 났다. 쇠창살로 질러진 방도 두개 있었다. 경찰서 유치장의 모습이었다. 그곳에 버젓이 포승줄 같은 게 걸려 있었다.
2003년 11월 ‘은혜사랑의집’ 모습. 수용자들의 숙소는 공터를 가운데 두고 배치돼 있다. 식사와 예배 시간을 제외하고 수용자들이 자유롭게 갈 수 있는 곳은 방과 화장실뿐이다. 박승화 선임기자 eyeshoot@hani.co.kr |
은혜사랑의집을 공동 조사하다
방을 대충 다 둘러봤는데 오직 한 방만은 열지 않고 버텼다. 한창 실랑이 끝에 문이 열리자 맨 앞에 있던 활동가가 구토를 했다. 의아해서 방을 들여다보는 순간, 어둠 속에서 역한 냄새가 쏟아져 나왔다. 그런 곳에 여성 장애인이 있었다. “규율을 어겨서 벌을 받는 중”이라고 했다. 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곳에 가둬두고 그곳에서 배설물 처리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은혜사랑의집은 특별히 나쁜 시설이 아니었다.
그곳에 다녀온 뒤에 제2회 전국인권활동가대회에 참가했고, 그 자리에서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인권센터, 인권운동사랑방, 천주교인권위원회 등 세 단체와 김칠준 변호사가 결합해서 각 단체에 제보된 사건들에 대해 공동 조사와 대응을 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그해 11월26일, ‘조건부신고복지시설 생활자 인권확보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준)’(이하 조건부시설공대위)를 만들었다.
조건부 신고시설은 사실상의 불법 시설이었던 미신고 시설을 보건복지부가 나서서 신고시설의 기준에 부합하도록 지원하여 전환해주기로 한 시설이었다. 은혜사랑의집도 조건부 시설이었다. 보건복지부가 2003년 1월에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미신고 시설은 전국 1008개였고, 거주인은 1만7천여명이었다. 2년 뒤인 2005년 1월의 복지부의 조사 자료를 보면, 미신고 시설 326개, 신고시설로 전환 직전인 조건부 시설은 883개로 나타났다. 모두 1209개 시설 중에 신고시설 기준에 부합한 조건부 시설이 73%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이곳 시설들의 거주인은 약 2만2천명이 되어 있었다. 정부가 나서서 신고시설로 전환해준다고 하니 도리어 시설도 늘고, 거주인도 늘어난 상황이었다.
조건부시설공대위는 그 뒤 몇년 동안 집중적으로 전국의 시설들을 조사했다. 주로 종교의 외피를 쓰고 예배와 기도 외에는 다른 프로그램이 전무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학대와 폭력이 일상인 시설들에서 주로 기독교 목사, 장로, 전도사 등이 이런 시설들을 운영했다. 새벽 4시부터 일어나서 예배를 보고, 아침, 점심, 저녁, 취침 예배까지 하루에 5번의 예배를 드리는 곳도 허다했다. 수용자의 가족들에게 매달 돈을 받아가면서 장애인들을 시설 운영자들의 집에 데려가 청소며 식사 준비까지 시켰다. 농장이나 공장에서 일을 시키는 일도 허다했다.
그런 곳에 수용된 사람들은 표정부터 생기가 없었다. 눈빛은 흐렸고, 전체적으로 무기력했다. 외부 사람들의 접근을 두려워했다. 똑같은 색깔의 트레이닝복과 짧게 깎은 머리는 그들에게 옷 입고, 머리할 자유마저 없다는 걸 보여주었다.
“겁이 나서 말 못 해요. 걸렸다가는 징벌방에 갇혀요.”
“여기서 언제 나갈 수 있을까요? 죽을 때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 거죠?”
그러니까 그곳은 지옥이었다. 시설 조사를 다녀온 뒤에는 폭음을 했다. 돌봄에 지친 가족들, 국가와 사회, 그리고 사회복지시설의 카르텔에 의해서 한 인간의 인생이 시설에 갇히는 일이 버젓이 사회복지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사회복지시설 비리 척결과 탈시설 권리 쟁취를 위한 공동투쟁단’ 회원들이 2008년 12월22일 오후 서울 태평로 시청앞 광장에 설치된 사랑의 온도계 옆에 영하로 떨어진 ‘장애인 인권온도계’를 설치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
탈시설을 천명하고 탄생한 발바닥
2005년에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나온 활동가 5명(박옥순, 박숙경, 여준민, 임소연, 김정하)이 시설 문제를 전담하기 위한 단체, 바로 ‘장애와 인권 발바닥행동’(이하 발바닥)이었다. 발바닥은 강령에서 다음과 같이 단체의 방향을 천명했다.
“우리는 집단생활이 가져오는 불가피한 인권 침해를 ‘어쩔 수 없다’고 강요하는 시설을 해체하고 지역사회에서 사람답게 살기 위한 운동을 실천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활동은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벗어난 품위 있는 인간성을 살려낼 것이며, 유행어가 되어버린 사랑, 나눔, 우정, 연대, 공생, 인권 등이 갖고 있는 소중한 가치를 삶에서 뿌리내릴 것입니다. 개인 삶의 역사가 풍요롭게 흘러갈 수 있는 장소 그곳은, 시설이 아닌 집과 마을이 되어야 합니다. 탈시설-자립생활운동은 인권을 보장하는 삶의 체계로의 방향전환임을 다시금 확신하며, 그 길에 공감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할 것입니다.”
나는 발바닥을 만들 때 그들을 격려하고 도움도 주었다. 발바닥은 창립 당시에는 2005년에는 ‘사회복지시설 민주화와 공공성 쟁취를 위한 전국연대회의’도 결성해내면서 당장은 시설의 민주적 운영과 인권 보장을 시급한 과제로 세웠지만, 곧바로 탈시설의 방향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나는 탈시설이라는 그들의 방향에는 동의하면서도 반신반의했다. 탈시설이 되기 위해서는 지역사회가 준비되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사회가 장애인들에 대해 우호적으로 바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01년에 시작된 이동권 투쟁이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아서 지하철 투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니만큼 어려운 일로 여겨졌다.
그런데 발바닥은 그런 일을 해냈다. 부지런히 시설을 조사하고 다니더니 시설 수용인들과 관계를 만들어냈고, 발바닥 활동가들을 신뢰한 장애인 당사자들이 아직 준비가 안 된 지역사회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2006년의 성람재단, 2007년의 석암재단 투쟁을 계기로 서울시가 시설 수용인의 ‘퇴소 욕구’ 조사를 했다. 이에 응한 시설 생활인들의 57%가 퇴소, 즉 탈시설을 희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9년에는 석암재단에서 나온 8인의 장애인들이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33일을 노숙농성을 하고, 국가인권위원회에서 62일간 농성을 전개했다. 그 뒤에 서울시가 정책적으로 미미하지만 탈시설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2013년 서울시를 시작으로 대구, 부산, 경남, 광주, 인천, 경기 등 전국의 지자체에서 탈시설 계획을 세워 나가기 시작했고, 2020년대에 들어서는 서울과 부산시에서 탈시설 조례가 만들어졌다.
탈시설 자립주택 등을 요구하며 장애인 생활시설에서 나와 서울 대학로 노숙 농성과 국가인권위원회 점거 농성을 벌였던 중증 장애인들이 2009년 8월4일 서울시가 이들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는 계획을 발표하자 농성을 중단하고 인권위 건물 외벽에 걸었던 대형 펼침막을 내리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
2012년부터는 형제복지원 사건공동대책위원회 사무국도 맡으면서 시설 문제의 연원에 대해서도 파고들었다. 형제복지원이 나오니 그 뒤를 따라서 선감학원, 서산개척단, 영화숙, 재생원과 같은 과거의 문제 시설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시설이 어제오늘 만들어진 게 아닌 뿌리 깊은 역사를 갖고 있음이 드러나는 중이다.
탈시설 운동의 상징인 경기도 김포시 양촌읍의 장애인 시설 ‘향유의집’(옛 석암베데스다요양원)은 지난 2021년 4월 문을 닫았다. 2021년 3월31일 시설 폐쇄 직전의 모습.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
최중증 장애인도 함께 사는 집, 여기가
발바닥은 문제가 된 석암재단을 프리웰(현 대표이사 김정하)로 바꾸고, 재단이 운영하던 ‘향유의집’ 시설 문을 닫았고, 그 자리에 ‘여기가(家)’란 장애인 자립지원 테마형 매입 임대주택을 짓고 있다. 김포에 들어서는 여기가는 “최중증 장애인을 위해 보편적 설계를 적용한 한국 최초의 소셜믹스형 지원주택으로, 장애인 가구 12세대, 미·비혼 양육가구 8세대, 1인 가구 8세대 모두 28세대가 함께 살 예정”이라고 한다.
발바닥은 한발 더 나아가 ‘모두를 위한 탈시설 행동연대’도 결성했다. 장애인만이 아니라 아동청소년, 노인, 홈리스, 이주민까지 탈시설하자는 취지다. 나아가 비인간 동물들까지 지역사회에서 같이 살자는 운동을 시작했다. 시설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감하는 게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더불어 인간의 권리를 누리면서 함께 사는 삶을 꿈꾸는 것이다.
올해 6월로 창립 20년을 맞는 발바닥, 시설이 당연한 것으로 알던 세상에 문제를 던지고, 탈시설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온 발바닥이 앞으로 만들어낼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나는 그게 궁금하다.(장애와 인권 발바닥행동 누리집 footact.org/)
박래군 |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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