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최초의 토니상 ‘어쩌면 해피엔딩’
윌 애런슨, 유기적으로 대화 나누며 협업
창작기간 길고 대우 안좋아…사명감 필요
윌 애런슨, 유기적으로 대화 나누며 협업
창작기간 길고 대우 안좋아…사명감 필요
‘어쩌면 해피엔딩’으로 한국인 최초 토니상을 받은 박천휴 작가 [NHN링크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무명의 작가’였던 박천휴에게 토니상으로 향하는 길은 길고 고단했지만, 매 순간 반짝반짝 빛이 났다. 박천휴 작가는 무려 석 달 동안 뉴욕 드라마 비평가 협회 어워즈, 미국 드라마 리그 어워즈, 외부 비평가 협회 어워즈, 미국 드라마 데스크 어워즈 등을 거치며 마지막 종착역에 다다를 때까지 열심히 뛰고 또 뛰었다.
“토니 어워즈에 가까워질 무렵엔 석 달 동안 뛴 결승선에 다다른 느낌이었어요. 피곤함과 설렘, 걱정과 흥분 등 모든 감정이 뒤섞인 기분이었습니다.”
레드카펫부터 마지막 작품상 발표까지, 장장 7시간에 걸쳐 진행된 제78회 토니상에서 ‘어쩌면 해피엔딩’(Maybe Happy Ending)은 6개의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그는 한국인 최초로 토니상(극본상, 작사·작곡상)을 받은 주인공이 됐다.
박천휴 작가는 서면 인터뷰를 통해 “지난 10년 동안 긴 마라톤 같았던 서울과 뉴욕에서의 ‘어쩌면 해피엔딩’ 작업 여정을 좀 더 뿌듯하게 마무리한 것 같아 기쁘다”고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윌휴 콤비’로 불리는 박천휴 작가와 윌 애런슨 작곡가 콤비의 첫 창작품이다. 2014년 작품을 쓰기 시작해 한국에선 2016년 초연됐고, 지난해 11월 브로드웨이에 상륙했다. 브로드웨이 개막 초반엔 부진한 티켓 판매율로 인해 누구도 지금의 성과를 기대하지 않았다. 뮤지컬은 작품을 보고 자신들을 ‘반딧불이’(fireflies)라고 불렀던 관객들을 통해 ‘입소문’이 났다.
‘N차 관람객’들도 상당했다. 박 작가는 뉴욕으로 휴가와 ‘혼공’(혼자 공연을 보는 것)을 즐긴 관객과의 일화도 들려줬다. 그 남성 관객은 당시 브로드웨이에서 10개의 공연을 예매해 관람하던 중이었다.
“‘어쩌면 해피엔딩’이 다섯 번째 공연이었는데, 공연을 보는 내내 집에 있는 아내가 그립고 함께 손을 잡고 이 공연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대요. 결국 남은 다섯 개의 공연 표를 팔고 비행기표를 바꿔 아내를 보러 집에 돌아갔다고 해요. 그리고 아내와 뉴욕에 와서 다시 이 공연을 함께 보기로 했다는 글을 읽었어요. 제게 쓴 글은 아니지만, 제가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칭찬으로 느껴졌습니다.”
지난 8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라디오시티 뮤직홀에서 열린 제78회 토니상 시상식에서 ‘어쩌면 해피엔딩’이 최고상인 뮤지컬 작품상 수상작으로 호명되자, 제작진과 배우들이 무대 위로 올라와 기뻐하고 있다. [AP] |
브로드웨이 버전의 ‘어쩌면 해피엔딩’은 소극장에서 올린 한국 공연과 달리 무대와 연출에서 변화가 많았다. 배우의 숫자도 3명에서 4명으로 늘었고, 오케스트라의 악기 숫자도 늘었다. 모듈식 무대로 두 주인공 클레어와 올리버의 공간을 구분한 것도 인상적인 점이다. 박 작가는 “한국 버전에는 암시만 되고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았던 장면을 브로드웨이 버전에서는 추가하기도 했다. 반대로 축약되거나 생략된 대사와 넘버도 있다”며 “모두 오랫동안 수정 작업을 거치며, 최대한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한 시도들이었다”고 말했다.
애런슨 작곡가와 박 작가의 인연은 1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 작가가 미국 뉴욕대에서 유학하던 시절부터 두 사람은 인연을 맺었다. 첫 뮤지컬은 동명 영화를 무대로 올린 ‘번지점프를 하다’. 이후 가장 최신작인 ‘고스트 베이커리’, ‘일 테노레’까지 함께 하며 한국 뮤지컬계에서 탄탄한 팬덤을 다지고 있다.
“한국에선 윌을 ‘작곡가’로 호칭하지만, 윌은 지금껏 계속 저와 함께 극작을 해왔어요. 미국에선 저희 둘 다 ‘라이터(writer) – 작가’ 즉, ‘쓰는 사람’이라고 호칭합니다. 음표든 활자든 구분하지 않고 저희는 지금껏 계속 쓰는 사람들이었어요. 비록 제가 먼저 생각한 아이디어라고 해도 함께 이야기를 짓고, 음악의 정서와 질감을 정하고, 매일 누구보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협업하고 있어요.”
두 사람은 협업자이기 전에 17년째 ‘매우 가까운 친구 사이’라고 한다. 박 작가는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이나 정서에 비슷한 면이 많다. 서로의 예술관에 대해 존경하는 마음도 있다”며 “그런 믿음을 바탕으로 하다 보니, ‘내가 할 일’, ‘네가 할 일’을 구분하지 않고 늘 매우 가깝게, 유기적으로 함께 작업한다. 작업의 지난함과 고통, 즐거움, 그리고 한 작품을 끝냈을 때 느껴지는 성장도 거의 매 순간 함께해 오고 있다”고 했다.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NHN링크 제공] |
‘윌휴 콤비’의 작품은 언제나 한국을 배경으로 한다. 1930년대 경성의 모습을 담은 ‘일 테노레’, 1970년대의 ‘고스트 베이커리’, 가까운 미래의 서울을 품은 ‘어쩌면 해피엔딩’까지, 시간대는 다르지만 뮤지컬에선 언제나 한국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박 작가는 “작가로서 내게 가장 친숙한 세상과 정서를 이야기로 만들고 싶다는 자연스러운 이유였다. 뉴욕에 오니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훨씬 많은 생각도 하게 됐다”며 “한국 관객들에게는 친숙하면서도 묘하게 낯선 질감의 세상을 선보이고 싶었고 해외 관객들에게는 낯설지만 묘하게 공감되는 세상을 선보이고 싶었다”고 말했다.
박천휴의 이름은 이제 K-뮤지컬의 희망이자 꿈이 됐다. 무수히 많은 창작자들의 제2, 제3의 ‘박천휴’를 꿈꾼다. 박 작가는 외롭고 고단한 공연 창작의 길을 버틸 수 있는 것은 ‘진심’과 ‘사명감’이라고 말한다.
“공연을 만드는 일은 평균적으로 5년 이상은 걸리는, 영화나 드라마보다도 긴 시간 매달려야 하는 일입니다. 반면 창작자에 대한 대우는 영화나 드라마에 비해 훨씬 더 보잘것없는 게 현실이에요. 빠른 성공을 위해 뛰어들기에 좋은 직업은 아닌 것 같아요. 또 지금 흥행하는 공연을 교과서처럼 따르기엔 아직 한국 뮤지컬이 산업화한 지가 그렇게 길지 않아, 충분한 교과서가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창작진들이 쉽게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진심으로 이야기와 음악을 써서, 진정성 있는 제작자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제작해야 버틸 수 있는 과정입니다.”
박천휴(왼쪽) 작가와 작곡가 윌 애런슨이 지난 8일(현지시간) 제78회 토니상 시상식에서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으로 극본상과 음악상을 받은 후 기념촬영하고 있다.[AFP] |
현재 그는 ‘일 테노레’와 ‘고스트 베이커리’의 국내 재공연과 영어 공연을 준비 중이다. 창작의 영역은 점차 확장 중이다. 뮤지컬 외에도 단편 영화와 TV 드라마 프로젝트도 계획하고 있다. “뉴욕을 배경으로 한 한국인 커플의 이야기”를 쓴 단편영화를 올리는 것도 박 작가의 바람이다. ‘어쩌면 해피엔딩’의 한국 공연도 기다리고 있다. 극장의 규모는 조금 더 커졌고, 시각적 요소에도 변화가 생겼다. “극장을 옮기는 것은 몇 년 전 결정, 토니 어워즈 수상과는 무관하다”고 한다.
그는 “수상 이후 한 명의 창작자로서 달라지는 건 없다”며 꾸준히 ‘작업하는 창작자’이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그저 어떠한 이야기와 음악을 들려주고 싶다는 충동과 의지가 계속되는 한 꾸준하고 진중하게 작업을 이어가는 창작자가 되고 싶어요. 제 평생 서울과 뉴욕에서 보낸 시간이 이제 거의 50대 50에 가까워지고 있는데요. 두 문화와 언어를 오가는 창작자로서 조금은 다른 관점이되, 많은 분의 공감을 끌어내고 의미가 있을 이야기들을 만들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