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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눈] 기본사회, 복지가 아니라 민주주의 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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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눈] 기본사회, 복지가 아니라 민주주의 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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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 정책 논의로 시작된 기본사회 담론이 본격화되고 있다.

그런데 내 주변에는 "이거 공산주의 아니냐"며 색깔론으로 공격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기본소득', '보편복지', '사회적 안전망'이란 단어만 나와도 거부감부터 드러낸다.

그러나 이 논쟁을 단순히 이념의 문제로만 치부하는 순간, 우리는 중요한 사회적 질문을 놓치게 된다.

기본사회란 모든 시민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기반을, 개인의 능력이나 처지에 관계없이 함께 마련하자는 사회적 합의이자 약속이다.

이는 더 많은 정부의 간섭이나 소득의 강제적 재분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본사회는 시장의 실패와 공동체의 해체 속에서도 시민 개개인이 존엄성과 자율성을 지킬 수 있도록 국가가 최소한의 사회적 토대를 마련하자는 제안이다.

기본사회는 국민들에게 '결과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복지'라는 명목으로 소수의 특정 계층을 위한 결과의 평등을 강조하면 소외된 다수의 계층은 불만을 갖게 된다.


'나도 세금 내는 사람인데 혜택 받는 거 하나 없다'며 볼멘소리 하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이 갖는 불만은 국가가 특정 계층의 생활고를 복지 차원에서 해결해 주어서가 아니라,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경제적·사회적 문제는 정책적으로 소외되어 있다'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대적 박탈감은 단순히 돈 몇 푼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국가가 나를 보호하지 않고 있다는 실망감, 그리고 공동체로부터의 이탈감에서 비롯된다.

1997년 IMF 사태 이후 지난 몇 십년 동안 우리 사회는 사회·경제적 변화 속에서 고용불안, 실질 소득 감소, 사회적 사다리의 붕괴로 사회 적대감이 커지는 현상을 경험했다.

그리고 사회 적대감은 우리 사회 양극화를 를 강화시켰다.

'2023 에델만 트러스트 바로미터(2023 Edelman Trust Barometer)'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정치경제 양극화가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한국은 심각한 양극화 위험국으로 꼽혔다.

보고서에서 아르헨티나가 가장 양극화된 나라로 조사됐고, 한국은 브라질, 멕시코, 프랑스, 영국, 일본, 네덜란드, 독일, 이탈리아 등과 함께 양극화 위험국에 올랐다.

기본사회는 '국가가 국민에게 시혜를 베푸는 복지국가' 모델이 아니라, 시민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설계할 수 있도록 돕는 사회적 인프라 구축을 의미한다.

여기서 핵심은 '보편성'이다.

일부를 위한 복지가 아니라, 모두를 위한 기본.

누구나 일시적 위기에 처할 수 있고, 누구나 돌봄이 필요한 시기를 겪는다.

우리가 보편적 교육과 보편적 의료를 당연하게 여기듯, 보편적 생계 기반과 주거, 돌봄, 노동 기회 역시 새로운 공공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

물론 이에 대해 "세금은 누가 내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는 것은, 지금의 불평등한 구조로 인해 사회 전체가 치르는 '불안의 비용', '갈등의 비용', 그리고 '불신의 비용'이다.

신자유주의적 개인 책임론 아래에서 많은 이들이 실패를 '개인의 탓'으로만 돌리지만, 실제로는 출발선 자체가 다른 경우가 많다.

기본사회는 이런 기회의 격차를 줄이는 사회적 환경을 마련함으로써, 개인의 노력이 정당하게 보상받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기본사회는 '결과의 평등'을 위한 복지가 아니라, '기회의 평등'을 통해 공정한 경쟁을 가능케 하는 민주주의의 기반이며, 신뢰 사회로 가는 출구다.

기본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 자유는 허상이며, 책임은 폭력이다.

기본이 무너질 때 사회는 서로를 경쟁자로만 인식하게 되고, 공동체는 해체된다.

지금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사회로부터 소외되었다고 느끼는가?", "왜 열심히 일해도 내일이 보장되지 않는가?", "왜 공동체가 점점 붕괴되고 있는가?" 이 질문들에 정직하게 답하려면, 단지 성장률이나 일자리 숫자가 아닌, 사회 구성원들의 생애 주기별 '삶의 기본'을 재정의해야 할 시점이다.

기본사회는 그 출발점이다.

이는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사회적 유산이다.

그것은 돈이 아니라, 불안 없는 일상, 기회에 대한 신뢰, 사회를 향한 소속감이다.

더 이상 '세대 갈라치기'와 '색깔론'으로 본질을 가릴 수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불안과 분열을 넘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연대의 틀, 바로 기본사회다.

김영식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 김영식,기본소득,기본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