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15일, '6·15 남북공동선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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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6월14일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김정일 당시 북한 국방위원장이 북한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악수를 나누는 모습./사진=행정안전부 대통령기록관 |
25년 전인 2000년 6월15일. 남과 북 정상이 분단 55년 만에 처음 만나 역사적인 합의를 이뤘다.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김정일 당시 북한 국방위원장이 북한 평양에서 만나 남북관계 개선, 평화통일을 위해 공동선언을 발표한 것. '6·15남북공동선언'은 분단 이후 처음 손을 맞잡은 남·북한 정상이 분단 문제를 평화적으로 풀어갈 길을 마련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다만 현재는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선언의 실효성이 사라진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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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열린 역사적 회담…3시간 넘게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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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전 대통령과 김 전 위원장은 2000년 6월13일부터 15일까지 평양에서 만남을 가졌다. 회담은 2000년 6월14일 백화원 영빈관에서 3시간 넘게 진행됐다. 두 정상은 밤 11시20분쯤 서명을 마친 뒤 다음 날인 6월15일 공식 발표했다.
선언 도입부에서 남북 정상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숭고한 뜻에 따라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13일부터 6월15일까지 평양에서 역사적인 상봉을 했고 정상회담을 가졌다"고 썼다.
그러면서 "남북 정상은 분단 역사상 처음으로 열린 이번 상봉과 회담이 서로 이해를 증진시키고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며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데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고 평가한다"고 했다.
선언 도입부에서 남북 정상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숭고한 뜻에 따라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13일부터 6월15일까지 평양에서 역사적인 상봉을 했고 정상회담을 가졌다"고 썼다.
그러면서 "남북 정상은 분단 역사상 처음으로 열린 이번 상봉과 회담이 서로 이해를 증진시키고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며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데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고 평가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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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개 합의안 도출…"통인은 우리 민족끼리 힘 합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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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6월14일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김정일 당시 북한 국방위원장이 북한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6·15남북공동선언'에 서명하는 모습./사진=행정안전부 대통령기록관 |
남북 정상은 다섯개 항으로 이뤄진 합의를 도출했는데 그 첫 번째는 "나라의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이어 두 번째 항목에서 통일 방안을 담았는 데 합의 과정에서 가장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담은 내용은 "남과 북은 나라 통일을 위한 남측 연합제안과 북측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이어 세 번째로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나가기로 했다"는 내용에 합의했다.
또한 "경제협력을 통해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해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했다"는 내용을 합의문에 명시했다.
이어 "이 같은 합의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해 이른 시일 안에 당국 사이 대화를 개최하기로 했다"는 내용이 마지막 다섯 번째 항목으로 기록됐다.
선언 말미엔 김 전 위원장이 향후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한다는 내용을 명시했다. 선언문에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도록 정중히 초청했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했다"고 담았다. 그러면서 두 정상의 친필 서명을 새겼다. 다만 실제 김 전 위원장의 서울 방문은 성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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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관계 경색에 역사로 남은 공동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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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6월13일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김정일 당시 북한 국방위원장이 북한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만나 기념촬영에 임한 모습./사진=행정안전부 대통령기록관 |
앞서 남북정상회담은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4년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중개로 성사될 뻔했으나 김일성 당시 주석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무산됐다. 이어 김정일 전 위원장 시절 식량난 등 경제문제가 극심해지자 정상회담 성사까지 속도가 붙었다.
또한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당선 직후부터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하며 북한과 대화, 협력을 위해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인도적 지원을 확대하고 대북 포용 정책을 추진해 남북관계에 긍정적인 분위기를 형성했다.
이어 2000년 3월9일 독일 베를린에서 한반도 냉전을 종식하고 평화공존을 이루기 위해 남북간 화해협력을 적극 추진해 나가겠다는 내용의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다. 또한 이후 박지원 당시 문화부장관 등을 통해 여러 차례 접촉을 시도하면서 남북정상회담의 기반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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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6월14일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김정일 당시 북한 국방위원장이 북한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6·15남북공동선언'에 합의한 뒤 양측 수행원과 기념촬영에 임한 모습./사진=행정안전부 대통령기록관 |
6·15남북공동선언의 후속 조치도 꽤 의미 있게 진행됐다. 실무회담을 통해 이산가족방문단을 교환했고 남북 경제협력추진위원회가 구성됐다. 장관급 회담 등을 통해 대화도 지속됐다. 분단으로 끊겼던 경의선, 동해선 연결을 위한 복원공사도 시작됐다. 또한 경제협력과 관광교류를 위해 금강산 특구를 개방했는데 2008년 7월 남한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이 벌어지면서 중단됐다.
또한 2007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과 김 당시 위원장, 2018년 문재인 당시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등 남북정상회담이 계승되는 성과를 낳았다. 다만 부시 행정부 출범, 북핵 문제 등으로 남북관계가 계속해서 경색되면서 현재는 6·15남북공동선언과 남북정상회담이 역사적 사건으로 남게 됐다.
양성희 기자 yang@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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