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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케임브리지대 도서관 한국학 일본학 부서장 오지연 사서가 자신이 도서관의 해리 파크스 아카이브에서 발견한 김옥균의 친필 한글 서한을 펼쳐놓고 있다. 2025년 6월 케임브리지대 도서관 해리 파크스 아카이브에서 촬영. [사진 오지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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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임브리지대 도서관의 외관. [사진 오지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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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주역 김옥균 (1851~1894).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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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주역 김옥균이 영국의 대아시아 외교 거물 해리 파크스에게 보낸 친필 한글 서한. 영국 케임브리지대 도서관 해리 파크스 아카이브에서 발견되었다. [사진 케임브리지대 도서관] |
" 당신이 조선 오실 때 나는 일본에 있어 뵈옵지 못하고 섭섭하오. 당신이 조선 공사 하신 일은 조선을 위하여 경사롭소. 당신 생각은 어떠하신지 모르오나 나는 일본을 여러 번 와서 일본 사정을 대강 알거니와 일본이 전습을 개혁하고 나라 모양이 되기는 당신의 공이 십 분의 팔 분인 줄 내가 잘 알았소. 조선 일은 당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선은 십 분의 십 분을 다 생각지 아니하시면 어렵소.내가 간사한 말 아니하는 줄 응당 아실 듯 하오. 아수돈 씨한테 자세히 들으십시오. 남은 말(은) 서울서 뵈옵고 여쭈리다. 태평히 오시기 바라오. 당신 따님 태평하십시오. (조선)개국사백구십삼년 삼월념일 김옥균 (현대어 번역: 오지연 케임브리지대 도서관 일본학·한국학 부서장 사서) "
김옥균 서한(원본 사진 및 현대어 번역 박스 참고)의 흥미로운 점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김옥균은 왜 한글로 영국의 대아시아 외교 거물 파크스에서 편지를 썼으며 어떻게 전달했나. 둘째, 김옥균은 당시 이미 갑신정변의 계획을 세우고 영국의 원조를 받을 생각이었나. 셋째, 파크스와 영국 정부는 이에 어떻게 반응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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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이 1882년 수신사절단으로 일본 방문 당시 스즈키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 [중앙포토] |
한글 사용 관련, 김종학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와 석주연 조선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모두 “자주독립 정신의 표출 및 보안을 위해서였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김 교수는 근대 한국 외교사 전문가이며 석 교수는 근대 국어 전문가이다. 김 교수는 “서한 말미에 청나라 연호 대신 조선 개국 493년이라고 썼다”며 “이것과 한글 사용은 중국으로부터의 독립 의식을 나타낸 것”이라고 했다. 석 교수 또한 “김옥균의 애국심이 작용했다”고 평했다. 두 교수 모두 “민감한 내용을 중국인과 일본인이 쉽게 읽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도” 한글로 썼을 것이라 추측했다.
그렇다면 파크스는 어떻게 한글 서한을 읽었을까. 석 교수는 파크스가 한국어와 한글을 알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이 서한을 김옥균으로부터 받아 파크스에게 전달한 애스턴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아수돈’의 한국어 실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정도”(오지연 사서)였다. “김옥균 서한에 쓰인 영어 번역문은 애스턴의 필체였으며, 그 번역은 놀랄 만큼 거의 정확했다”고 오 사서는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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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갑신정변의 현장이었던 우정국의 모습. [중앙포토] |
김옥균 서한을 본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당시의 정황은 다음과 같다. 편지가 쓰인 1884년 4월 15일(음력 3월 20일) 김옥균은 일본에 있었다. 1883년 5월부터 시작된 세 번째 일본 방문이었고 귀국을 앞두고 있었다. 일본에서 그는 주일 영국공사관 서기관인 애스턴으로부터 청나라 주재 영국공사 파크스가 조선과의 통상조약을 비준하기 위해(1883년 11월 체결) 주조선 영국공사를 겸하게 되어 조만간 서울을 방문하리라는 소식을 듣는다. 파크스는 일본 메이지유신에 큰 영향을 끼친 ‘막후 조력자’로 평가받는다.
“김옥균은 대일 차관 교섭의 실패로 귀국 후 자신과 동지들의 정치적 입지가 더욱 좁아질 것이 분명해진 만큼, 조선 개혁의 방향 가운데 혁명적 정변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박선영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는 평했다. “그러한 시점에서 ‘일본의 근대국가 수립 즉 메이지유신에 대해 파크스의 공이 절대적이었고 조선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다’는 식의 표현을 하고 있으니, 이는 곧 영국이 일본에서 그러했듯이 조선 변혁의 후견자 역할을 해줄 수 있는지를 타진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김종학 교수는 “편지에서 ‘조선은 십 분의 십 분을 다 생각하지 않으면 어렵소’라고 하는 것은 쿠데타를 통한 근본적이고 철저한 개혁을 암시하는 것”이라며 “그는 당시 이미 일본의 재야 정치인들과 갑신정변을 모의하고 있었고 애스턴에게도 어느 정도 누설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수신자 파크스, 일본 메이지유신에 혁혁한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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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왼쪽)은 조선 주재 영국 총영사로 임명된 윌리엄 조지 애스턴(가운데)을 통해 조영수호통상조약을 비준하러 오는 해리 파크스(오른쪽)에게 친필 서한을 보냈다. |
이때 애스턴은 파크스에 의해 막 주조선 영국총영사로 임명된 상태였고 김옥균보다 앞선 4월 25일 조선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따라서 김옥균은 이 한글 서한을 애스턴에게 주며 파크스에게 전달해달라고 부탁한 것으로 추정된다. 개항기 외교사 전문가인 김흥수 홍익대 교양과 교수에 따르면 파크스는 1884년 5월 1일 서울로 왔고, 김옥균도 이때 인천항에 도착하였다. 둘은 그 후에 만났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영국의 반응은 어땠는가. 박선영 교수는 “편지에서 ‘당신 생각이 어떠하신지는 모르겠으나’라는 표현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 김옥균도 영국의 태도가 이미 미온적이라는 판단을 하는 듯하다”고 분석했다. 김종학 교수는 “이 서한이 영국을 끌어들여 거사를 하겠다는 뜻으로는 볼 수 없다”며 “당시 김옥균은 이미 고토 쇼지로 같은 일본 재야 정인들과 갑신정변 모의를 한 상태였다. 다만 영국이 간접적인 지원을 해주거나 혁명 정부에 우호적일 경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의중을 떠본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이어 “김옥균은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을 앞두고 11월부터 조선 주재 공사들을 찾아다니며 계획을 밝혔다”며 “하지만 대부분이 과격하고 위험한 계획이라 만류했다. 그래서 실제로 정변을 일으킬 때는 이들과 연락을 취하거나 도움을 받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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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 주역들의 일본 망명 직후 1885년 모습.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중앙포토] |
종합해서 볼 때 “김옥균은 친일파로 보기 어렵다”며 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신분 타파를 비롯한 조선의 개혁이 최우선 목표였고 내부에서 개혁 동력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외부로부터의 원조를 구한 것이었으며 그러한 시도는 우리 역사상 최초였다. 일본이 아니라 다른 어떤 나라라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다만 손을 내민 것이 일본의 재야 세력뿐이었기 때문에 그들과 손을 잡았을 것이다. 그들은 일본 주류 세력도 아니었으므로, 일본 정부가 김옥균을 사주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김 교수는 다만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나는 바람에 그 이후 10여 년간 조선 사회에서는 개화나 외교라는 말이 상당히 터부시되었다”며 “김옥균의 실패가 조선의 근대화와 개방을 후퇴시킨 면이 있다”고 덧붙였다.
박선영 교수는 “정변의 실패 직후 파크스가 애스턴에게 보내는 글에서 김옥균에 대해 심한 비난을 퍼붓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김옥균이 이러한 파크스와 영국에게 정변과 관련하여 일말의 기대를 걸고 있었음을 이번 서한을 통해 확인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매우 가슴 아프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문소영·유성운 기자 sym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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