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마릴린 먼로
‘예쁘고 해맑은 미녀’?
“그들은 나를 몰랐다”
그녀의 진짜 속마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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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릴린 먼로가 수영장에서 수영복을 입은 채 특유의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 [게티이미지닷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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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캘리포니아 자택 정원에 있는 마릴린 먼로. [Baron/Hulton Archive/게티이미지닷컴] |
편집자 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미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풍성한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좋아요’와 댓글, 공유는 콘텐츠 제작과 전파에 큰 힘이 됩니다.
배우의 ‘달력 스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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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릴린 먼로가 영화 시사회에서 흰색 모피 코트를 입은 채 등장하는 모습 [M. Garrett/게티이미지닷컴] |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미칠 노릇이었다.
1952년, 5월. 영화사 20세기 폭스는 예상치 못한 위기를 맞았다. 화제의 신인, 곧 자사의 마스코트가 될 게 분명한 20대 여배우가 논란에 휘말렸다.
내용도 당혹스러웠다. 그녀가 노골적인 알몸 사진을 찍었다는 것. 얼마에? 겨우 50달러를 받고서. 비상이었다. 그것이 3년 전, 그러니까 그녀가 이름을 제대로 알리기 전 벌인 일탈이었다고 한들 문제 소지가 컸다.
당시 미국이 그랬다.
겉으로는 표현의 자유를 외쳤지만, 안에서는 어디보다 엄격한 도덕 잣대를 내밀었다. 특히나 문화계 내 모순 정도는 극에 치달았다. 이런 가운데, 한 젊은 여배우가 과거의 누드모델 경험을 인정한다? 심지어 당시 촬영 목적도 고작 ‘달력 판매’ 촉진용이었다? 이걸 인정하는 순간 그녀의 주가는 지하를 뚫을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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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에서 내린 마릴린 먼로 [M. Garrett/게티이미지닷컴] |
폭스사는 다급히 그녀를 불렀다.
천진난만하게 웃는 그녀에게 대고 당부했다. 어딜 가든, 누구를 만나든 “그 여자는 내가 아니다”라고 잡아떼라고. 그렇게 입단속이 이뤄지는 듯했다. 하지만…. “당신이 나체 사진의 실제 모델이 맞나요?” 기자들이 그녀에게 대고 물었을 때, 당사자가 보인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오, 맞아요!” 그녀는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응수했다! 늘 그랬듯 명랑하고, 활기차게.
“그때는 돈이 없어서 찍었어요. 집세도 밀렸고, 자동차는 아예 압류된 상태였어요. 밥값도 부족해 자주 굶었는데, 그래서인지 복근이 더 선명하게 찍혔죠!”
그녀는 분홍빛 미소를 보였다. 그러곤 내가 아니라는 말은 못하겠다. 잘못한 게 없는데 왜 거짓말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말을 줄줄 덧붙이곤 다시 순진한 표정을 지었다. 폭스사 관계자가 보면 목덜미를 잡을 광경이었다(폭스사 또한 막판에는 ‘마릴린을 믿고 솔직하게 대처하자’는 결정을 내렸다는 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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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와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마릴린 먼로. [게티이미지닷컴] |
이처럼 논란의 주인공이 되고도 그저 해맑게 있기만 한 그녀의 이름은 마릴린 먼로였다.
그렇다. 가까운 미래,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 중 한 명으로 꼽히게 될 그 여인이 맞다. 아울러 고작 몇 년 전인 그 시절, 50달러가 없어 옷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는 그녀의 해명 또한 사실이었다.
그 마릴린이 돈에 쪼들렸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로도 이는 믿기에 쉽지 않은 말이었다. 사람들은 마릴린이 품은 뜻밖 사연에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신반의하던 이들 얼굴에는… 의외로 안타까움과 안쓰러움의 표정이 번갈아 차오를 수밖에 없었다.
마릴린. 그녀가 대체 어떤 기구한 삶을 살았기에 그랬을까. 또, 이번 스캔들을 두고 ‘지침’대로 행동하지 않은 그녀 앞에는 무슨 미래가 깔려있을까.
보육원을 전전했던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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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릴린 먼로의 아기 시절. [Modern Screen, 1953년 10월호/wikimedia] |
마릴린은 1926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출생했다.
마릴린은 유년 시절부터 가정의 위기를 겪었다.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나기 전부터 가정을 버렸다. 남은 어머니는 불안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결국은 그녀 또한 딸을 두고 병원에 수용되고 말았다. 떠나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마릴린은 겨우 일곱 살이었다.
마릴린은 그때부터 부모의 지인과 먼 친척, 보육원과 슬럼가를 전전했다. 그사이 누군가에게는 성추행도 당했다. 그녀는 그 충격으로 긴 기간 발작과 말더듬증에도 시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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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릴린 먼로와 그녀의 첫 번째 남편 제임스 도허티의 모습. [Dell Publications, Inc. New York, Modern Screen, 1952년 12월호/wikimedia] |
마릴린은 하루빨리 안정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결혼을 택했다. 마릴린은 1942년, 같은 학교의 연극반 선배인 제임스 도허티와 식을 올렸다. 이때가 열여섯 살이었다.
평화는 길지 않았다. 남편은 곧 제2차 세계대전에 징집돼 떠났다. 더는 혼자가 되기 싫었기에 어린 나이부터 식을 올렸으나, 1년 만에 또 혼자의 일상을 맞았다. 마릴린도 곧 군수 공장에 들어갔다. 작업복 차림으로 낙하산을 고쳤다. 군사용 무인기에 페인트를 칠했다. 그렇게 해 푼돈이라도 모아둘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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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릴린 먼로가 배우로 나서고 얼마되지 않았을 때의 모습. [Dave Cicero-International News Service/wikimedia] |
인간의 삶은 때때로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반환점을 맞는다.
마릴린의 생도 그랬다. 1945년, 마릴린은 사진작가 데이비드 코노버와 마주한다. 그는 젊은 여성 노동자를 찍기 위해 그곳에 온 사내였다. 마릴린은 그런 그에게 ‘예술적인’ 황홀함을 안긴다. 그녀는 카메라 앞에서 다양한 표정을 지었다. 여러 포즈를 취했다.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고혹적 눈빛, 풍만한 몸매가 작품성을 끌어올렸다.
마릴린에게 매료된 코노버는 단박에 알아차렸다. 이 여자가 있어야 할 곳은 할리우드라고.
여기서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녀가 어떻게 단박에 프로 사진사를 홀릴 수 있었느냐고. 요즘으로 치면 모델 과외나 수업 한 번 들어본 적이 없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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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릴린 먼로. 1962. [George Rinhart/게티이미지닷컴] |
사실 마릴린에게는 어릴 적부터 간직한 꿈이 있었다.
그게 배우였다.
결혼하지 못한 그때. 그러니까 이 집 저 집을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던 시절. 한 위탁 가정은 마릴린을 허구한 날 극장으로 내쫓곤 했다. 마릴린은 이에 뜻하지 않게 종일 영화를 봐야 했다. 자꾸 보니 그게 재밌었다. 그렇게 난생처음 꿈이 생긴 것이었다.
훗날 그녀는 당시를 이렇게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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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릴린 먼로, 영화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 촬영과 관련,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채 정장 남성들에게 둘러싸인 모습. [20th Century Fox/wikimedia] |
물론 꿈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게 있다. 특히나 예체능 분야에선 그런 게 적지 않다. 다행히 마릴린은 갖추고 있었다. 당시 사회가 배우에게 요구한 자질, 찬란한 외모를. 마릴린은 자기 얼굴, 나아가 몸매 또한 또래와는 다르다는 걸 알았다.
그렇기에 남들이(특히 남자가!) 자신을 더 빨리, 더 쉽게 좋아하게 된다는 점 또한 알고 있었다. 이 깨달음이 그녀의 연기와 포즈 잡기에 자신감을 심어준 것이었다.
이 또한 훗날, 그녀가 옛일을 돌아보며 꺼낸 말이었다. 머리칼을 찰랑거리며, 너무도 당연했던 이야기를 꺼내듯 담담하게.
50달러조차 아쉬웠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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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를 배경으로 웃고 있는 마릴린 먼로 [George Barris/wikimedia] |
모델 겸 배우가 된 후로는 곧장 성공했을까.
그렇지는 않았다.
우선 예명을 마릴린 먼로로 지은 건 탁월했다. 잘 닦인 은색 조명을 떠올리게 하는 이 이름은 어머니의 옛 성인 먼로, 과거 브로드웨이 스타인 마릴린 밀러를 섞어 만든 것이었다. 마릴린의 본명은 평범한, 좀 더 소박한 느낌의 노마 진(Norma Jeane)이었다.
잘한 일은 또 있었다. 특히나 별 특징 없는 갈색 곱슬머리를 화려한 금발로 바꾼 결정은 신의 한 수였다. 이는 그녀의 뇌쇄적 분위기를 부각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 밖에도 유명 잡지의 표지 모델, 무엇보다도 영화사 20세기 폭스와의 계약 성공 등.
겉보기에 그녀의 삶은 화려하게 바뀌었다.
하지만, 그만큼 그늘도 두꺼웠다. 밝아지는 빛만큼 짙어지는 그림자. 이 말은 앞으로도 마릴린의 삶을 통째로 관통하게 된다. 일단, 마릴린은 그 사이 남편 도허티와 이혼 절차를 밟았다. 그가 아내의 연기와 노출을 받아들이지 못한 데 따른 결과였다.
그녀의 연예계 성적도 좋지만은 않았다. 의욕에 찬 마릴린은 곧장 카메라 앞에 섰지만, 많은 순간 통편집의 수모를 겪었다.
주어지는 역할은 단역, 출연료는 지폐 몇 장. 언젠가는 사실상 실직자로 나앉기도 했다. 잘 보이기 위해 인맥을 쌓고, 눈길을 끌기 위해 사교장을 드나들다보니 지금껏 번 돈도 다 썼다. 마릴린은 이 무렵, 문제의 누드 달력을 위한 모델로 섰다. 당시에는 정말 50달러도 아쉬웠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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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스팔트 정글’의 한 장면. [TV-Radio Mirror, Macfadden Publications, 1961년 5월호/wikimedia] |
그러던 그녀는 당시 할리우드의 거물 조니 하이드와 연을 맺는다. 그의 소개로 영화 <아스팔트 정글(1950)>에 출연한다.
마릴린은 두목의 정부로 등장한다. 그녀에게 주어진 건 몇 줄 대사뿐. 하지만 그녀는 이 작은 역할을 더할 나위 없이 촘촘하게 소화한다. 특히나 몽환적 눈빛, 맹하고도 매혹적인 분위기를 뿜어내는 데 신들린 기량을 뽐낸다. 마릴린은 <이브의 모든 것(1950)>에도 출연, 이 작품에서도 연기다운 연기를 선보인다.
마릴린은 그렇게 다시 돛을 폈다. 순풍을 타고 열심히 나아갔다. 그런데 그쯤, 논란이 터지고 만 것이었다. 달력 누드모델 이력이. 이대로 가다간 부정적 이미지가 박힌 채 곧장 침몰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살아남은 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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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릴린 먼로, 영화 ‘왕자와 무희’ 홍보를 위해 찍은 사진. [Milton H. Greene/wikimedia] |
“…그래서인지 복근이 더 선명하게 찍혔죠!”
대중은 누드 논란에 대한 마릴린의 솔직한 고백을 놓고 당황했다. 이처럼 쿨하게 받아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고아와 다름없는 시작, 실패의 역사, 씻어낼 수 없는 통증, 그럼에도 피워낸 꿈…. 사실 알만한 이들은 마릴린의 암담한 과거를 알고 있었다. 다만, 말 그대로 많은 부분을 각색된 루머처럼 치부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게 이번 스캔들 때문에 사실로 재검증된 순간, 사람들은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좋아하는, 세계 곳곳에서 통용되는 이른바 ‘살아남은 장미’ 스토리였기에 그랬다.
그녀는 뜻하지 않게 세상의 감성을 건드린 것이었다. 동정심을, 보호본능을 자극한 것이었다.
물론, 이는 그녀가 정확히 의도했던 바일 수도 있다. 그녀는 본인의 표정만큼 마냥 맹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위기는 기회로 바뀌었다.
환풍구, 전설의 그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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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에 있는 극장 밖에서 기자와 팬에게 둘러싸인 마릴린 먼로. [M. Garrett/게티이미지닷컴] |
드디어 작품 복도 터지기 시작했다.
‘달력 스캔들’이 따라붙던 마릴린은 영화 <나이아가라(1953)>에서 남편을 죽이려는 팜파탈로 등장한다. 이어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1953)>에서 금발의 아름다운 쇼걸,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1953)>에서 독특하면서도 사랑스러운 모델로 열연을 펼친다.
이 영화 세 편은 그해 모두 흥행에 성공한다.
어느덧 마릴린은 솔직 당당하고도 해맑은(나쁘게 말하면 머리가 빈) 금발 미녀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달력 논란 따위도 서사를 위한 소재가 됐을 뿐, 이제는 전혀 문제될 게 없었다.
처절한 2차 대전 후 허무주의에 빠진 모두가 그녀를 보고 위안을 얻었다. 아치형 눈썹, 진한 오렌지 컬러의 립스틱, 가슴과 허리를 강조하는 핫핑크 드레스 등 그녀의 모든 게 이목을 끌었다. 엉덩이를 대담하게 흔들며 걷는 걸음걸이만 놓고서도 ‘먼로 워크’라는 말까지 생길 정도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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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릴린 먼로, 미국 뉴욕 거리에서 영화 ‘7년 만의 외출’을 촬영하는 모습. [Sam Shaw/wikimedia] |
1954년, 9월의 어느 날. 새하얀 드레스와 뉴욕의 지하철 환풍구.
마릴린은 이날, 신화가 된다.
당시 마릴린은 <7년 만의 외출(1955)>에 들어갈 장면을 찍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지하철 환풍구 위에서 허벅지가 드러나도록 스커트를 펄럭이며 웃는 장면이었다. 천이 말려 올라가는 걸 애써 막고 있지만, 아슬아슬한 긴장감만은 한껏 표출한 모습이었다. 코믹하면서도 관능적인 이 신은 당시로는 아주 파격적인 연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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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많은 사람들이 마릴린을 보기 위해 늦은 시간까지 자리를 지켰다고 한다. [게티이미지닷컴] |
실제로 촬영 현장에만 2000여명 관중이 몰려왔다.
환풍구 바람이 올라올 때마다 환호가 쏟아진 탓에 수없이 다시 찍어야 했다는 후문이다. 마릴린은 이 영화에서 이웃 유부남의 성적 환상 대상으로 등장한다. 이 작품 또한 흥행 반열에 올랐다.
‘원하는 형태’의 사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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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1월 결혼식을 올린 후 조 디마지오와 마릴린 먼로. [Unknown, Los Angeles Daily News/wikimedia] |
이처럼 화사한 꽃길이 놓였는데, 앞서 예고한 그늘은 어디서 찾아볼 수 있단 말인가.
이쯤 되면 이런 궁금증이 또 생길 수 있다. 마릴린은 분명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원하는 형태의 사랑을 받는 데는 실패했다. 그리고, 이는 그녀의 내면을 착실하게 갉아먹게 된다.
마릴린은 첫 남편 도허티와 갈라선 후에도 두 번이나 더 이혼을 겪었다.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은 조 디마지오. 그는 메이저 리그 야구 선수 출신이었다. 56경기 연속 안타라는 기록을 갖춘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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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고 있는 모습으로 포착된 마릴린 먼로. [게티이미지닷컴] |
1954년, 마릴린과 디마지오는 일본으로 신혼여행을 갔다. 이때 그녀 나이는 스물여덟이었다.
마릴린은 옆 나라인 한국도 방문했다. 6·25 전쟁을 치른 주한 미군 앞에서 위문 공연을 했다. 마릴린은 어딜 가도 VIP 대우를 받았다. 디마지오는 그게 거슬렸을지도 모른다. ‘양키스의 범선’으로 칭송받은 자신보다 더 인기 많은 ‘백지장’ 아내…. 디마지오와 마릴린 사이 다툼이 잦아졌다.
188㎝에 89㎏인 거구의 남편은 어느덧 아내에게 위협도 가했다. 둘은 <7년 만의 외출> 속 화제의 장면을 찍은 그날 밤에는 대놓고 큰 충돌을 벌였다고 한다. 결국, 이들은 1년도 안 돼 연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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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릴린 먼로와 아서 밀런의 결혼식 모습. [TV-Radio Mirror, Macfadden Publications, 1961년 5월호/wikimedia] |
마릴린은 이쯤부터 불면증을 겪었다. 언젠가부터는 진정제와 진통제 없이는 쪽잠도 누리기 힘들었다.
마릴린의 세 번째 남편은 미국 연극의 거장, <세일즈맨의 죽음>의 아서 밀러였다. 하지만, 이 두 사람도 해피 엔딩을 맞지 못했다. 이번에도 결혼 생활은 1956년부터 5년 남짓이었다. 마릴린은 결혼 기간 중 유산을 겪기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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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무도회에 참석한 마릴린 먼로, 1957 [Associated Press/wikimeida] |
기자와 대중도 마릴린을 가만히 둘 생각이 없었다.
이들은 마릴린을 자기들이 보고 싶은 대로만 봤다. 이들 모두 그녀가 똑똑해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헤프고, 나사 빠진 모습으로 있기를 바랐다. 즉, 매번 그녀를 천둥벌거숭이처럼 은근히 조롱하고, 모욕감을 안겼다.
마릴린이 진지하게 말하면 기자는 “스펠링이 무엇인지나 알아요?”고 물었다(그녀는 이때 “저는 제가 말하는 말의 철자를 하나도 몰라요!”라며 웃으며 받아쳤다고 한다).
대중도 마찬가지였다. 가령 마릴린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 실리자 많은 이가 관계사에 “마릴린이 실제로 책을 읽은 게 맞느냐”는 문의를 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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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To the Actor: On the Technique of Acting’을 읽고 있는 마릴린 먼로. [Ed Feingersh/Michael Ochs Archives/게티이미지닷컴] |
이는 마릴린의 뼈가 섞인 토로였다.
실망에 실망이 쌓였다. 이 감정이 낳을 수 있는 건 비관과 절망밖에 없었다.
마릴린은 그렇게 안에서부터 서서히 붕괴했다. 그녀는 약에 취했다. 밀려오는 우울은 그릇에 넘치기 시작했고, 그칠 줄 모르는 비웃음은 심지마저 갉아먹었다.
“버번위스키가 어디에 있어요?” 마릴린은 <뜨거운 것이 좋아(1959)> 촬영 중, 이 단순한 대사를 수십번 틀렸다고 한다. 대사를 쓴 종이를 서랍 안에 두기도 했지만, 그것마저 몇 번째에 뒀는지 헷갈려 또 NG를 내고 만다. 이쯤 마릴린은 더는 반짝이는 별로 볼 수 없었다. 언제 떨어질지 알 수 없는 위태로운 별일 뿐이었다.
“가장 인정받지 못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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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색 이브닝 가운을 입고 카펫 위에 누워 표정 연기를 하는 마릴린 먼로. [Gene Lester/게티이미지닷컴] |
1962년, 8월 5일. 마릴린이 자기 집에서 죽었다. 어쩌면 그 전날에. 고작 서른여섯 나이였다. 공식 사인은 약물 과다 복용이었다.
그날 새벽 마릴린의 가사 도우미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을 때는 이미 모든 일이 벌어진 후였다. 마릴린은 죽음조차 영화 같았다. 굳이 장르를 따지자면 누아르 또는 미스터리물에 가까웠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생의 마감이었다.
뉴욕 ≪데일리 미러≫는 곧장 1면 헤드라인에 “마릴린 먼로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는 식의 문구를 실었다. 마릴린의 담당 의사는 “(그녀는)급격한,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기분 변화를 동반한 심각한 두려움과 우울증에 시달렸다”며 “과거에도 의도적으로 약물을 과다 복용한 적이 있었다”고 했다.
당시 당국은 조사와 진술 취합 등 절차를 거친 뒤 “어떠한 범죄 행위의 징후도 볼 수 없다”는 취지로 타살 가능성을 배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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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릴린 먼로 [Hulton Archive/게티이미지닷컴] |
죽기 직전, 나날이 불안정해지던 마릴린.
그녀는 그럼에도 여전히 아름다웠고, 끝까지 매혹적이었다. 정치 명문가 케네디의 두 남자,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로버트 케네디 법무부 장관 사이 염문설이 돌 만큼 아우라는 여전했다. 그녀는 어쨌거나 별은 별이었다. 그 시대 가장 찬란하게 빛나던 스타였다.
그래서일까. 그런 마릴린의 죽음에는 케네디가(家) 관련설 등 지금도 여러 의혹 내지 음모론이 끈끈하게 따라붙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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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릴린 먼로,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45번째 생일을 맞아 ‘Happy Birthday’를 부르는 모습. [게티이미지닷컴] |
마릴린의 사망은 미국뿐 아닌 전세계에 충격을 줬다. 숨진 그달 주요 국가, 주요 도시의 신문 판매 부수가 급증했다.
세상은 끝까지 마릴린을 다시 창조하고, 다시 소비했다. 현대 미술은 죽은 마릴린을 팝아트로 되살렸다. 여러 책과 영화가 그녀를 직간접적으로 다뤘다.
마릴린이 죽은 후 그녀의 생전 애장품도 모습을 보였다. 책이었다. 한 권도 아닌, 수백권의 책이었다. 정치, 역사, 문학, 철학 등 장르도 다양했다.
또 한 번 순진한 여자를 연기한 후, 대기실로 오면 곧장 책을 읽었다는 마릴린.
마릴린은 매 순간 기민하고, 영리했다.
하지만 사회는 그녀의 기민함도, 영리함을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원하면서도 원하지 않는 세상 속에서 숨 쉬듯 모순을 느꼈을 것이다. 이에 맞서기 위해 수차례 변신을 시도했지만, 결국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어요.” 영화감독 조슈아 로건의 말이었다.
허무하게 떠나간 한 시대의 아이콘. “꿈과 악몽이 함께 만든 최고의 슈퍼스타.(AllMovie)” 그런 그녀에 대한 정의로 이보다 적절한 말이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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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릴린 먼로. [Photoplay, 1953년 12월호/wikimedia] |
<참고 자료>
마릴린 먼로 MY STORY, 마릴린 먼로, 해냄출판사
세상을 유혹한 여자 마릴린 먼로, 칼 롤리슨, 예담
마릴린 먼로 그리고 케네디 형제, 이상돈, 에디터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