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당 지시로 조직 망친 일부 상급자
항명으로 조직 지킨 대다수 직원
경호처 쇄신, 옥석 가리기부터
#1월 15일 오전 5시쯤 윤석열 전 대통령 2차 체포영장 집행
이광우(전 경호본부장): "차 움직여." (직원들 응하지 않음)
이광우: "(김성훈에게) 애들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김성훈(전 경호처 차장): "(욕설로) 다 나가라 XXXX들아. 안 움직이고 뭐 해."
항명으로 조직 지킨 대다수 직원
경호처 쇄신, 옥석 가리기부터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
한국일보가 입수한 대통령경호처 연판장 전문(왼쪽)과 고 안병하 치안감. 그래픽=송정근 기자ㆍ연합뉴스 |
#1월 15일 오전 5시쯤 윤석열 전 대통령 2차 체포영장 집행
이광우(전 경호본부장): "차 움직여." (직원들 응하지 않음)
이광우: "(김성훈에게) 애들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김성훈(전 경호처 차장): "(욕설로) 다 나가라 XXXX들아. 안 움직이고 뭐 해."
중간 간부 A: "직원들이 따르지 않습니다. 절대 못 합니다."
이날 윤 전 대통령이 체포됐다.
#2024년 12월 16일 경호처 간부회의
김성훈: "보안 조치하라." (9일 전 "삭제하라. 대통령 지시다"의 연장선)
직원 B: "차장님 저는 그렇게는 못 하겠습니다."
김성훈: "(격노하며) 내가 책임진다잖아. 시키는 대로 하란 말이야.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직원 B: "저는 대통령이 시켜도 못 하겠습니다."
비화폰 내역은 끝내 삭제되지 않았다.
한국일보 사건팀의 경호처 내부 취재 내용을 토대로 재구성한 결정적 순간의 상하 간 대화다. '항명'이라고 쓰고 '의기(義氣)'라고 읽는다. 경호처 직원들의 끊임없는 저항과 단호한 지시 불이행이 없었다면 윤 전 대통령 체포 시점도, 비화폰의 운명도, 내란 혐의 전모를 파헤치는 과정도 달라졌을 게다. 가정은 무의미하고 불필요하다지만 저들의 분투는 암울한 12·3 불법 계엄 사태의 기록에서 밝게 도드라진다.
총을 쏘라는 지시에 응하지 않은 적극적 저항부터 차벽에 막힌 체포영장 집행이 가능하도록 버스 키를 두고 내리는 소극적 저항까지. 경호처 직원들은 혼돈의 역사를 떳떳이 마주하기 위해 제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다. 참고에 적시한 형법 155조(증거 인멸)에 저촉된다는 뜻으로 '24.12.07 지시 사항-전체 단말기(비화폰) 내 데이터 삭제' 부분만 빨갛게 쓴 실무 보고서는 순명과 항명 사이의 고뇌로 읽힌다. "증거 인멸 실행용 보고서를 쓰라고 지시한 자(김성훈)가 뜨끔하라고 빨간 글씨로 바꿨다"는 진술, 그 소리 없는 항명에 가슴이 먹먹하다.
어디 그뿐인가, 책임자 사퇴와 조직 쇄신을 열망하는 연판장엔 일선 경호관뿐 아니라 중간 간부 90% 가까이가 이름을 올렸다. 그것은 '하나된 명예, 영원한 충성'이라는 처훈이 짓누르는 상명하복 위계질서를 떨쳐 내고 창설 62년 만에 터뜨린 절규다. 조직을 망친 극히 일부 상급자(윤석열, 김성훈 등)와 조직을 지킨 대다수 직원을 분리해 경호처를 바라봐야 하는 이유다. 경호처 전체를 윤 전 대통령 사병으로 간주하거나 적폐 청산 대상으로 일반화하는 건 거칠고 무정하다. 쇄신도 중요하지만 옥석 가리기가 선행돼야 한다는 얘기다.
의식의 흐름에 기대 5·18민주화운동 때 신군부의 발포 명령을 거부한 고 안병하 치안감(당시 전남도경 국장)을 소환한다. 강원 양양 출신의 육사 8기로 1950년 한국전쟁 춘천 전투, 1962년 국립경찰 특채 후 간첩 검거 및 무장공비 섬멸 작전 등 공적으로 다수의 훈장을 받은 그는 항명 뒤에 보안사 동빙고 분실로 끌려갔다. 언론은 '전남 경찰의 수장이 임무는 내팽개치고 달아났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집안은 풍비박산 났다. 고인은 8년 뒤 고문후유증으로 숨졌다. 2005년에서야 인권경찰의 표상으로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살아서는 도망자가 죽어서 영웅으로 바뀐 셈이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는 격언의 실증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정의를 갈구하는 항명'이 받은 대접이 극단적으로 이러하다. 최고 권력자의 불법 계엄과 그를 맹종하는 일부 상급자의 부당한 지시에 각자 방식으로 맞선 경호처 직원들의 노고가 인정받길 기대한다. 본보 사건 기자들은 실상을 집요하게 취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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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찬유 사회정책부문장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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