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한국일보 언론사 이미지

[지평선] 심리전과 대북확성기

한국일보
원문보기

[지평선] 심리전과 대북확성기

속보
李대통령 "산업안전 위험 사업장 불시단속·근로감독관 대폭 증원" 지시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북한이 우리 군의 대북 확성기 방송 중지에 호응해 대남 소음 방송을 멈춘 것으로 보이는 12일 인천 강화군 송해면 당산리 마을회관에서 주민들이 밝은 표정으로 대화하고 있다. 인천=연합뉴스

북한이 우리 군의 대북 확성기 방송 중지에 호응해 대남 소음 방송을 멈춘 것으로 보이는 12일 인천 강화군 송해면 당산리 마을회관에서 주민들이 밝은 표정으로 대화하고 있다. 인천=연합뉴스


심리전은 전쟁 양상을 바꾸기도 하는 중요 전략·전술로 꼽힌다. 적군 사기 저하, 민심 이반, 항복 유도 등을 목표로 한다. 2600여 년 전 쓰여진 손자병법에 “백전백승은 최선이 아니다. 싸우지 않고 상대를 굴복시키는 것이 최고 전략”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현대전에서 심리전이 군사 전략으로 공식 채택된 건 1차 세계대전이다. 적국 지도자를 야만적·비인간적 존재로 묘사한 전단지와 포스터 등을 많이 썼다. 증오심을 유발해 충성심을 흔드는 방식이다.

□ 2차 세계대전에선 심리전 부대가 정식 편제됐다. 영화·음악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를 활용한 감성적 접근법까지 시도하면서 의외의 결과를 낳기도 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의 심리전 라디오 방송은 미군 병사들 사이에서 '도쿄 로즈'라는 애칭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여성들을 동원해 미국을 조롱하거나 전황을 왜곡했지만, 미국 팝 음악을 들을 수 있어서 향수병에 시달리던 태평양 전선의 병사들이 애청했다. 도쿄 로즈 중 한 명으로 일본계 미국인인 이바 도구리는 2006년 미군 참전용사회로부터 시민상을 받기까지 했다.

□ 심리전하면 대북확성기 방송을 빼놓을 수 없다. 1963년 본격 운용돼 분단의 상징처럼 됐다. 60년 넘게 이어져 세계 최장기 심리전 수단으로 꼽힌다. 방송 내용도 시대에 따라 달라져 살아 있는 심리전 역사 교과서로도 불린다. 운용 초기에는 주로 북한 체제 비판과 귀순 유도가 주였다면 지금은 북한 주요 도시 날씨 정보, 남북한 언어 해설, K팝 등으로 채워지고 있다.

□ 북한이 대북확성기 방송을 체제 자체를 위협하는 행위로 간주한다니 성공적 심리전이라 볼 수도 있겠다. 문제는 북한이 기괴한 소음을 틀어대는 대남확성기 방송으로 대응하면서 수면장애와 청력장애 등 접경지역 주민 피해가 크다는 점이다. 심리전이 민간인에게 직접적 피해를 미친 사례로 국제사회에서 인권과 군사 윤리 문제를 지적하는 지경이다. 지금은 인공지능(AI) 등 최첨단 기술을 동원한 하이브리드 심리전이 펼쳐지는 시대다. 레트로한 대북확성기는 이제 중지가 아니라 중단해도 되지 않을까.

이동현 논설위원 nani@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