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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프로야구는 '영남 대 호남'이라는 지역 구도가 빚어낸 스토리는 국민적 스포츠로 자리매김했다. 그중에서도 해태 타이거즈의 4번 타자 김봉연과 삼성 라이온즈의 4번 타자 이만수가 펼친 '100호 홈런 레이스'는, 기록 그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단순한 "누가 먼저 넘긴다"를 넘어, 사람들은 두 선수에게 자신의 지역과 자존심을 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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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사실 그라운드 밖에서는 살가운 '가족'이었다. 함경북도 북청 출신의 두 집안이 1‧4후퇴 때 남하한 뒤 맺어진 인연 덕분이다. 김봉연의 손윗동서는 복싱 세계챔피언 김기수이고, 이만수의 동서는 여섯 자매 중 맏형님이니, 모임이 잡히면 자연스레 한자리에 모였다.
그러나 경기 전 불펜에서 마주칠 때면, "오늘은 양보 없다"는 눈빛이 먼저 오갔다고 한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했던가—100호 홈런을 다투던 시절, 두 선수의 눈빛은 그라운드에서만큼은 오롯이 경쟁자였다.
홈런이 귀했던 시대였다. 비거리를 늘릴 기술과 장비가 지금처럼 보편화되지 않았고, 공인구 반발력도 낮았다. 그래서 100호 홈런에는 고급 승용차와 금 10냥짜리 골든배트, 그리고 VTR까지 부상이 걸렸다. 자동차 보급률이 5% 남짓이던 80년대 중반, "우승보다 100호"라는 말이 허투루 나온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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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정적 장면은 1986년 9월 2일 대구구장에서 나왔다. 1번 타자로 선 이만수는 빙그레 선발 천창호의 몸쪽 높은 직구를 초구에 그대로 받아쳤다. 타구는 장외로 사라졌고, 대한민국 최초의 통산 100호 홈런 기록이 동시에 완성됐다.
이만수 특유의 '껑충 세리머니'가 시작되고, 관중석은 환호로 끓어올랐다. 금세 언론 헤드라인은 "헐크가 촌놈 제쳤다"로 도배됐고, 영남 팬들은 환희에, 호남 팬들은 아쉬움에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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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만 놓고 보면, 오늘날 최정이 500홈런을 넘긴 시대다. 그러나 기록의 절대값이 모든 감정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80년대 '100호'는 누구에게나 닿을 듯 말 듯한 간절함이자, 지역감정이 증폭되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드라마를 완성한 도화선이었다. 마치 "우리 동네 선수가 먼저 해내야 한다"는 숙명 같은 기대감이었달까.
이제 40여 년이 흘렀다. 그 시절을 증언할 기사 스크랩은 노란빛으로 바랬지만, 두 사나이가 남긴 장면은 여전히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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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런이 남발되는 오늘날에도, 야구장 마이크를 통해 "이만수야!" "김봉연이야!"를 외치던 목청과, 그 외침에 대구와 광주가 동시에 숨죽이던 긴장감은 팬들의 가슴속에서만큼은 전혀 퇴색되지 않았다.
돌아보면, '최초의 100호'는 단지 하나의 벽을 허문 기록이면서, 또 한 시대의 낭만을 규정한 장면이었다. 투쟁과 화해, 가족적 정겨움과 치열한 각축이 뒤섞인 서사를 품었기에—그것이 바로 지금도 두 이름 앞에 '전설'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다.
오늘도 야구장은 새로운 기록을 꿈꾸지만, 관중석 어딘가에는 여전히 "그때 100호 홈런 봤어?" 하고 회상하는 팬들이 앉아 있을 것이다.
사진=헐크파운데이션 이만수 이사장
(편집자주 2025년 6월 11일 헐크파운데이션 이만수 이사장이 SNS에 올린 회고 글을 바탕으로 정리한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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