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신실이 12일 레인보우힐스에섯 열린 한국여자오픈 첫날 티샷하고 있다. 사진 | KGA |
[스포츠서울 | 음성=장강훈 기자] ‘경기 스피드업’은 모든 스포츠가 지향하는 가치다. 편당 러닝 타임이 1분 내외인 이른바 ‘숏폼 드라마’가 북미와 유럽, 중국, 일본 등에서 열풍일 정도로 ‘짧은 것’이 각광받는 시대여서다.
국내 프로스포츠 중 러닝타임이 가장 긴 콘텐츠는 단연 골프다. 최소 6㎞ 이상 산과 들을 걸어야 하는데, 원하는 지점으로 정확히 공을 보내 정해진 홀에 집어넣어야 하는 종목 특성상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골프를 잘 모르는 사람은 “늘 같은 장면을 보는 것 같다”고도 한다. 똑같은 장면을 다섯 시간 이상 보는 건 고역이다.
배소현이 12일 레인보우힐스에섯 열린 한국여자오픈 첫날 티샷하고 있다. 사진 | KGA |
반면 골프 팬들은 ‘같은 장면의 다른 모습’에 매료된다. 경사나 잔디길이, 홀까지 남은 거리, 페어웨이 폭 등에 따라 다른 선택을 하고, 이 선택의 결괏값으로 스코어를 결정하므로 바둑을 연상하는 팬도 있다. 평지가 아닌(국내 골프장은 대부분 산속에 있다) 곳을 6㎞가량 걸어 다니면서도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버디를 낚는 선수들의 모습에 경외감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그런데도 골프는 여전히 ‘길고 지루한 스포츠’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12일 충북 음성에 있는 레인보우힐스 컨트리클럽(파72·6767야드)에서 막을 올린 DB그룹 제39회 한국여자오픈 골프선수권대회(총상금 12억원)는 ‘골프는 지루하지 않다’는 것을 주장(?)할 만한 정보가 비치 돼 눈길을 끈다.
DB그룹 제39회 한국여자오픈이 열린 레인보우 힐스에 비치된 최대 허용 시간 규정. 사진 | 음성=장강훈 기자 zzang@sportsseoul.com |
대한골프협회(KGA) 홈페이지뿐만 아니라 스타트하우스와 미디어센터 등 곳곳에 ‘플레이 속도’라는 제목의 문서가 보였다. 라운드당 선수가 사용할 수 있는 ‘최대 허용 시간’을 홀별로 정리한 문건이다.
가령 531m짜리 1번홀(파5)은 티잉그라운드에 올라선 순간부터 홀아웃까지 19분을 쓸 수 있다. 314m짜리 2번홀(파4)에서는 18분, 173m짜리 3번홀(파3)은 14분 만에 주파해야 한다. 조별 출발시간부터 적용해 홀과 홀 사이를 이동하는 시간을 포함하므로, 여유부릴 틈이 없다. 물론 샷 준비부터 완료까지 ‘샷클락’에 관한 규정도 엄격하게 적용한다.
박민지가 레인보우 힐스에서 열린 한국여자오픈 1라운드에서 공략 위치를 보고 있다. 사진 | KGA |
어쨌든 7번홀(518m)과 16번홀(514m·이상 파5)은 일명 ‘투온 트라이(두 번의 샷으로 온 그린을 노리는 플레이)’ 선수가 많아, 20분과 22분으로 시간을 더 할애한 점도 눈에 띈다. KGA 관계자는 “그린 위에 플레이하는 선수가 없어야 투온 트라이가 가능하다. 앞조 선수들이 모두 홀 아웃할 때까지 기다리는 선수가 많아, 최대 허용시간을 초과하는 경우가 잦다”고 귀띔했다.
한국여자오픈 한 라운드에서 선수가 쓸 수 있는 시간은 최대 5시간 5분. 투온 트라이로 지체한 시간을 다른 홀에서 당겨야 시간 내 라운드를 마칠 수 있다. 때문에 중간중간 뛰어다니는 선수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래도 파5홀에서 투온에 성공해 이글을 노리는 선수가 등장하면, 골프팬의 지루함을 한 번에 날린다. ‘장타자’에 대한 로망이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지현이 레인보우 힐스에서 열린 한국여자오픈 1라운드에서 공략 위치를 보고 있다. 사진 | KGA |
홀별 최대 허용 시간을 초과하면? 최악의 경우 벌타를 받는다. 이번 대회는 러프가 매우 길고 핀 위치가 까다롭다. 덥고 습한 기후까지 급습해 후텁지근한 날씨 속에 치르는데다 업다운이 심한 코스라 체력 소모가 더 크다. 첫날부터 최대 허용 시간에 육박하거나 살짝 넘긴 선수가 더러 눈에 띈 이유다.
겉으로만 보면 길고 지루한 스포츠인 것처럼 보이지만, 선수들은 숨돌릴 틈 없이 걷고 휘두르고 굴린다. 샷클락이나 선수 또는 조별 최대 허용 시간을 중계화면 등에 노출하면, 골프가 지루한 스포츠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zzang@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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