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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노조, 트럼프에 등돌리나…LA 이민자 단속 반대시위로 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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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노조, 트럼프에 등돌리나…LA 이민자 단속 반대시위로 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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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 그랜드 파크에서 8일 서비스종업원국제노조가 주최한 이민자 단속 반대 시위에서 참가자들이 당국에 체포된 이 노조 대표 데이비드 우에르트의 석방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로스앤젤레스 그랜드 파크에서 8일 서비스종업원국제노조가 주최한 이민자 단속 반대 시위에서 참가자들이 당국에 체포된 이 노조 대표 데이비드 우에르트의 석방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미국 노조가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에서의 이민자 단속에 대한 반대 시위 분출을 계기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에 대해 갈팡질팡하던 기존 입장을 접고 본격적인 반대 시위에 나섰다. 트럼프 행정부로서는 서민층의 지지를 받던 이민 정책에서 최대 복병을 만난 셈이다.



8일 엘에이 중심가 그랜드 파크에서는 캘리포니아 지역의 최대 노조인 서비스종업원국제노조(SEIU)가 다른 노조들과 연대해 트럼프 행정부의 이민자 단속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캘리포니아 서비스종업원국제노조의 데이비드 우에르타 대표가 이민세관단속국(ICE)의 이민자 단속을 방해한 혐의로 체포된 것이 발단됐다. 우에르타 대표는 단속을 지켜만 봤는데도 체포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날 법원에 출석해 보석금 5만달러를 내고 석방됐다.



이날 미국 노조 진영에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갖는 운수노조 팀스터 및 전미자동차노조(UAW)의 캘리포니아지부, 미국노동연맹–산별조직회의(AFL-CIO)의 전국본부는 엘에이 시위 및 이민자 단속 반대에 연대를 공식 선언하고 참가했다. 집회에 나온 이들은 “우리가 모두 우에르타다”를 외쳤고, 호텔·공항 노동자 노조인 ‘유나이트 히어’ 등도 참가해, “노동과 이민의 투쟁은 하나”라는 구호를 외쳤다. 에이피(AP) 통신은 우에르타가 ‘저항의 얼굴’이 됐다고 전했다.



시위를 주도한 서비스종업원국제노조는 미국과 캐나다의 건물서비스, 보건의료에 종사하는 190만명의 노동자를 대표한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최대 노조이다. 2023년 기준, 캘리포니아에서 노동 인구의 약 3분의 1은 이민자이며, 미국 평균인 18%보다 훨씬 높다. 특히 서비스업 분야의 노조에서는 이민자, 특히 미등록 이민자의 비중이 높아지는 추세다. 미국노동연맹-산별조직회의의 대변인 스티브 스미스는 “합법 여부와 관계없이 조합원이 될 수 있으며, 우리는 그들을 보호할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시위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노조 쪽의 입장을 새롭게 규정하는 분수령으로 평가받고 있다. 미국의 노조들은 노동자 계층이 트럼프의 미국 중심주의 메시지에 호응해, 트럼프에 대한 대응 수위를 놓고 곤욕을 겪어왔다.



전통적으로 미국 노조들은 민주당을 지지해 왔다. 하지만 미국 노조의 노동자들은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때부터 백인 노동자 중심으로 공화당 지지로 일부 돌아섰고, 트럼프의 등장 이후 탈민주당 조류가 가속화됐다. 지난 대선에서는 흑인과 중남미계 노동자 내에서 트럼프 지지가 늘었다. 트럼프가 공화당을 ‘노동자 정당’ 이미지로 재편하는 데 성공하면서, 일부 노조는 그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노동부 장관으로 지명된 로리 차베스더리머는 팀스터의 강한 지지를 받았고, 전미자동차노조의 숀 페인 대표도 최근 트럼프의 수입 자동차 관세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전통적인 블루칼라 조합원 중 다수는 트럼프의 국경 통제 강화와 강제 추방 정책을 지지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 노조들은 트럼프에 대한 대응을 놓고 갈팡질팡하다가, 이번 로스앤젤레스 이민자 단속을 계기로 반 트럼프로 입장을 정립하고 있다. 노조 내에서 늘어난 이민자 비중과 지역 주민들의 분노를 고려하면, 이번 사태를 방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20세기 중반까지 노동조합은 이민자들을 기존 노동자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존재로 봤다. 미국 제조업의 쇠퇴 이후 노조는 새 회원을 찾기 위해 서비스업으로 눈을 돌렸고, 엘에이는 1980년대 서비스종업원국제노조가 청소노동자를 조직하면서 이런 흐름의 시작점이 됐다.



이번 단속에서 표적이 된 미등록 이민자도 엘에이 주민 구성과 경제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2023년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로스앤젤레스 메트로폴리탄 지역에서 고졸 이상 학력을 가진 중남미계 이민자의 72%는 미국에서 20년 이상 거주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미국 전체 평균인 54%나, 플로리다의 43%보다도 높은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1980~2000년대에 멕시코 경제 위기와 중미 내전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이들로, 세금을 내며 범죄 전력이 없는 시민들이다.



노동계는 “이민자 없는 캘리포니아 경제는 상상할 수 없다”며 합법·불법 여부와 관계없이 이민자 노동자를 보호하겠다는 입장이다. 서비스종업원국제노조와 연대 성명을 낸 노조들도 “노동자와 이민자 권리는 분리될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노동 전문가들을 인용해 “이번 사태가 미국 노동운동이 이민자 보호를 핵심 의제로 삼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다”며 앞으로 노동계와 트럼프 행정부의 갈등이 더욱 격화될 것으로 전망했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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