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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상식 못 따라가는 정치… ‘사회적 합의’ 변명은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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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상식 못 따라가는 정치… ‘사회적 합의’ 변명은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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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정부, ‘혐오정치’ 무너뜨릴 성평등·인권 등 높은 기준의 ‘평등가치’ 설정하고 실현하기를

제21대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한 2025년 6월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이재명 대통령과 배우자 김혜경 여사가 국회 청소노동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제21대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한 2025년 6월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이재명 대통령과 배우자 김혜경 여사가 국회 청소노동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2025년 6월4일. 새 정부가 출범했다. 계엄 사태 이후 딱 6개월 만이다. 지난 시간은 참 아득하고도 격렬했지만, 지금은 그런 소회를 나눌 겨를조차 없다. 새로운 대통령은 무거운 과제들을 잔뜩 짊어지고 출발선에 섰다. 그 무게 위에 한마디 더 얹어드리고자 한다.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이번 대선에서 눈에 띄는 몇 가지 숫자를 살펴보자. 우선, 전국 투표율 79.4%. 대한민국 국민의 정치적 열망이 느껴진다. 다음으로는 김문수-이준석 득표율 합계가 49.49%로 이재명의 득표율 49.42%와 거의 일치한다. 셋째, 방송 3사 출구조사에 따르면 20대 남성의 77.3%가 김문수 혹은 이준석을 지지했다. 20대 여성의 51.8%가 이재명을 선택하고 5.9%가 권영국에게 투표한 것과는 대조적인 수치다.



앞으로 우리는 이 숫자들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재배치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주목한 숫자는 이준석의 최종 득표율 8.34%다. 여론조사 공표 금지 직전, 그에 대한 지지율은 10%를 상회했다. 기세를 탄다면 15%까지도 가능하리라는 예측이 있었다. 그러나 대선 막판, 그 지지세는 급격히 꺾였다. 왜였을까? 역시 대선 후보 티브이(TV)토론회에서 나온 문제적 발언이 미친 영향을 무시하긴 어렵다.





‘대중의 상식’ 무시한 이준석의 ‘혐오정치’

막말과 함께 정치인 이준석의 날것 그대로의 얼굴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간 아무리 “혐오를 팔아 표를 사는 정치인”이라 비판해도, 국민은 여전히 그를 잘 몰랐다. 자신의 혐오정치를 ‘공정’이나 ‘문명’, 그것도 아니라면 그럴듯한 사자성어 따위로 포장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평소 여성 문제에 아무런 관심이 없던 그가, 오직 상대 후보를 공격하기 위해 성폭력을 전시하는 것에 ‘일반 시민’들도 깜짝 놀라버린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분명해진 것이 있다. 그것은 정치가 응원봉 광장이 보여준 놀라운 시민의식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점, 그리고 정치인의 윤리적 자질에 대한 국민적 합의 수준이 일부 남초 커뮤니티가 공유하는 감각보다 훨씬 높다는 사실이다. 남초 커뮤니티와 사이버레커에 기대어 정치적 퍼포먼스를 펼쳐온 이준석으로서는 이번 도발이 그렇게까지 문제가 되리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남초 대장 놀이에 빠져 놓친 것은 바로 ‘일반 대중’의 상식이었다.



한국 사회의 상식은 수준이 높다. 그러므로 앞으로 사회통합과 평등사회를 말할 때 이재명 대통령은 지금까지보다 더 높은 기준에서 ‘사회적 합의’의 선을 설정해도 괜찮다. 지금이야말로 ‘사회적 합의’를 변명 삼아 “나중에”를 외칠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지체돼온 사회 분야 정책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야 할 때다. 무엇보다 우리는 탄핵 반대 집회를 통해 어떻게 평등의 가치를 짓밟는 흥분이 반민주적 파시즘의 자양분이 돼왔는지 똑똑히 확인하지 않았는가.



2022년 5월10일 국회 앞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거리 밖으로 밀려난 ‘여성가족부 폐지 저지 공동행동’ 회원들이 ‘여성가족부 폐지 철회’를 요구하는 펼침막을 들어 보이고 있다. 김진수 선임기자

2022년 5월10일 국회 앞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거리 밖으로 밀려난 ‘여성가족부 폐지 저지 공동행동’ 회원들이 ‘여성가족부 폐지 철회’를 요구하는 펼침막을 들어 보이고 있다. 김진수 선임기자


차별금지법 제정과 성평등·장애인 예산 확대

그리하여 대통령께 첫 100일의 과제로 제안하는 건 응원봉 광장에 세워진 “평등의 화살표”(체제전환운동)가 지워지지 않도록 새로운 사회를 구체적으로 설계해나가는 ‘평등사회 리부트’다.



이재명 정부는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청소년, 농민, 노동자, 세입자, 이주민을 비롯한 다양한 시민들이 자신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을 품고 나와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켰던 응원봉 광장의 열망과 함께 탄생했다. 그런 이재명 정부가 가장 먼저 착수해야 할 과제는 반차별 기조를 명확히 세우고, 반(反)진보운동 백래시(반발)에 단호하게 대응하는 일이다. 이는 박근혜와 윤석열, 두 번의 보수 정권 대통령 탄핵을 계기로 급속도로 성장한 극우에 맞서기 위한, 민주주의 회복의 필수적 처방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첫째,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추진해야 한다. 이 법은 헌법이 보장한 평등권을 실질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기본법으로 시민사회와 국제사회가 오랫동안 그 제정을 요구해온 과제다. 국민 대다수가 이미 그 필요성에 공감하는 만큼, 차별금지법 제정은 우리 사회가 혐오와 차별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집단적인 선언이자 민주주의의 새로운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윤석열 정부가 박살 내놓은 성평등 예산과 제도는 단순한 복원을 넘어 과감한 확대가 필요하다. 응원봉 광장에 섰던 여성 시민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받아안기 위해서라도 성평등의 가치는 더 분명하게 이야기돼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정책 공약집에서 “여성의 권리 증진 및 건강, 안전 사회 실현”을 약속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선 비동의강간죄 제정과 낙태죄 대체 입법, 그리고 포괄적 성평등 교육의 제도화가 시급하다.



셋째, 이동권 보장과 탈시설 등 장애인 인권 의제에 대한 정부의 명확한 관심 표명과 정책적 지원 계획이 필요하다. 이준석은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비문명적’이라고 폄하했지만, 우리는 ‘문명’의 의미를 제대로 정의해야 할 시점에 서 있다. 문명이란 누군가를 배제하고 비인간화함으로써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확장해나가는 과정에서 비로소 그 꼴을 갖춰가는 것이다. 이규식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의 말처럼 “이 땅에 살고 있는 장애 시민이 어디로든 이동할 수 있어야 그 사회를 민주주의라 부를 수 있다”.



고공농성 500일을 열흘 앞둔 2025년 5월11일, 박정혜 금속노조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수석부지회장이 텅 빈 주차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신다은 기자

고공농성 500일을 열흘 앞둔 2025년 5월11일, 박정혜 금속노조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수석부지회장이 텅 빈 주차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신다은 기자


박정혜·고진수·김형수의 목소리를 듣자

두 번째 과제는 노동하는 사람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되돌려주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대선 하루 전인 6월2일, 6년 전 노동자 김용균씨가 산업재해로 사망했던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또다시 노동자 김충현씨가 목숨을 잃었다. ‘김용균법’이라 불리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제정됐지만, 여전히 사람을 살리는 데는 충분하지 않았다. 새 정부가 인간을 기계보다 하찮은 것으로 취급하고 ‘위험을 외주화’하는 불평등을 해소하고 노동권을 회복하기 위한 실효성 있는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해주기를 바란다.



한편으로 특수고용 플랫폼 노동자와 프리랜서 노동자 등 지금 한국 사회를 지탱하는 ‘불안정 노동자’들의 권리 보장이 법제화돼야 한다. 코로나19를 거치며 한국 사회의 노동 구조는 근본적으로 변화했지만, 윤석열 정부는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들 불안정 노동자는 “장시간 노동, 저임금, 무권리”라는 삼중고 속에 일하면서 사회안전망의 외부로 밀려나 있다. 산업재해보상보험 및 고용보험 적용 확대는 물론, 플랫폼 기업에 사용자로서 책임을 부여하는 제도 개편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논의들은 외국인 이주노동자에 대한 인정과 존중을 바탕으로 이뤄져야 한다. 극우 정치인들이 국제노동기구(ILO) 협약을 파기하고서라도 ‘저렴한 노동력을 국외에서 사오자’는 망언을 서슴지 않는 현실은 외국인 혐오 정서를 부추기고, 더불어 사는 사회를 해치는 위험한 흐름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정책 공약집에 명시된 “일하는 모든 사람의 권리 보장 추진”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이라는 범주에는 한국 경제의 토대를 함께 일궈온 외국인 이주노동자도 당연히 포함돼야 한다.



노동권은 단순한 경제적 권리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기초다. 이 권리를 확립하지 않는다면 정의로운 사회로의 전환도 없다. 이런 변화의 의지를 보여주는 그 첫걸음으로 대통령이 2025년 6월5일 현재 517일째 고공농성 중인 박정혜 금속노조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수석부지회장, 113일째 고공농성 중인 고진수 세종호텔지부 지부장, 82일째 고공농성 중인 김형수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장을 직접 찾아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기후위기 시대의 국가 비전은 기후 및 생태 정의를 사회 전반적인 정책의 토대로 삼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후보 시절 “환경 분야에서도 세계의 모범이 되는 케이(K)-이니셔티브를 만들겠다”며 “국민이 참여하는 탄소 감축 실천” “2040년까지 석탄발전 폐쇄 및 전기차 보급 확대” “탈플라스틱 로드맵 수립” 등을 약속한 바 있다. 이는 기후정의를 위한 의미 있는 제안이자 변화의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기후 및 생태 정의는 단순히 탈석탄이나 탈플라스틱만으로 실현되지 않는다. 선거 기간 중 제주 지역 환경단체가 이재명 후보에게 제안했던 기후정의 과제를 살펴보자. 첫째, 제주 제2공항 계획 전면 백지화, 둘째, 신규 가스발전소 건설계획 전면 백지화 및 해상풍력 발전사업의 공공성 강화, 셋째, 지방정부 대중교통 예산 지원 및 교통기본법 제정, 넷째,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지속 가능한 농어업으로의 대전환 등이 그 내용이었다.



한국노총·민주노총 등 양대 노총과 모두를위한최저임금운동본부가 2024년 6월3일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제22대 국회 1호 노동법안으로 ‘최저임금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선임기자

한국노총·민주노총 등 양대 노총과 모두를위한최저임금운동본부가 2024년 6월3일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제22대 국회 1호 노동법안으로 ‘최저임금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선임기자


성장주의 넘어선 정의로운 전환을 위하여

이처럼 기후정의는 개발 위주의 정책 기조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지역사회와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고려하는 전환을 뜻한다. 이를 위해서는 에너지, 교통, 농업, 어업, 임업 등 국가 기반 시스템 전반을 공공성과 지속가능성을 중심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성장주의를 넘어선 정의로운 전환”(기후위기 비상행동)을 위해서는 생태적 돌봄뿐 아니라 사회적 형평성과 민주적 절차, 그리고 기후위기 속에서도 인간다운 삶을 가능케 하는 기본 권리(너무 덥거나 추울 때 일하지 않을 권리, 안전한 주거를 누릴 권리 등)를 보장하는 다층적인 접근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선서 후 국회 청소노동자와 의회 방호 직원을 별도로 만났다는 뉴스를 접했다. 누가 대한민국을 가능하게 하는지 제대로 보여준, 품격 있는 행보였다. 이와 더불어 부디 대통령이 “배제된 존재들, 밀려나는 삶들, 불려지지 못하는 정체성들,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과 함께”(권영국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 가시기를 바란다.





손희정 시사덕후·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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