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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참여 개헌’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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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참여 개헌’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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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시민들이 개헌안 뼈대 만들고 국가공동체 리모델링 위한 공론장 열어야

이재명 대통령이 2025년 6월5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안전치안점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이재명 대통령이 2025년 6월5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안전치안점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그는 웃고 있었다. 제21대 대통령 선거일인 2025년 6월3일 오전, 서울 서초동 투표소에 나타난 윤석열을 향해 기자들이 물었다. “탄핵 때문에 조기 대선을 치르게 됐는데 국민께 할 말 없습니까?” “사전투표가 부정선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윤석열은 대답 없이 환하게 웃으며 유유자적 보도진 앞을 지나갔다. “왜 웃으시는 겁니까?”란 기자 질문이 무색하리만치 그는 당당했다. 윤석열은 살아 있다. 내란 혐의 피고인으로 재판정에 나와서도 태연스레 졸고, 반려견을 데리고 한강공원을 느긋이 산책하고, 부정선거 음모론을 담은 영화를 보겠다고 팬미팅을 하듯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윤석열은, 불구속 자유인의 신분으로 여전히 활개를 치며 이 하늘 아래 살고 있다.



윤석열과 김건희씨가 제21대 대통령 선거일인 2025년 6월3일 서울 서초구 원명초등학교에 마련된 서초4동 제3투표소에서 투표를 마친 뒤 차량으로 향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윤석열과 김건희씨가 제21대 대통령 선거일인 2025년 6월3일 서울 서초구 원명초등학교에 마련된 서초4동 제3투표소에서 투표를 마친 뒤 차량으로 향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정권교체가 해피엔딩은 아니다

이번 대선은 내란 종식을 위해 싸워온 국민의 승리다. 그러나 이재명 대통령의 당선은, 앞으로 우리가 헤치고 나가야 할 길고 험난한 여정의 새로운 출발점일 뿐이다. 윤석열의 친위 쿠데타를 ‘매우 특이하게 우둔하고 오만한’ 개인의 일탈로 보면 해법은 간단하다. 그럼 대통령만 바꾸면 된다. “흉악한 괴물을 물리치고 공주와 왕자가 결혼해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해피엔딩 동화처럼, 승리의 감동에 취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자. 현직 대통령이 군병력을 출동시켜 국회를 깨고 들어가 국회의원을 ‘수거’한다는 황당무계한 음모가 실제로 실행될 수 있었다는 게 우리의 비통하고 부끄러운 현실이다. 독선적인 최고 권력자를 제어할 삼권분립의 제동장치는 망가졌고 적대와 혐오는 더 큰 적대와 혐오를 낳았다. 무한 대립의 평행선 위에서 정치는 마비되고, 산업화와 민주화의 기적을 이뤘다는 대한민국에서 민생과 인권은 바싹 마른 낙엽처럼 맥없이 바스러졌다. 3년 전 소스 배합기에 끼여 노동자가 숨진 에스피씨(SPC) 제빵공장에서 며칠 전 또 다른 여성 노동자가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사망했고, 6년 전 청년노동자 김용균씨가 숨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대선 전날 또 다른 하청 노동자가 사망했다. 이들의 죽음 앞에 산업화도 민주화도 부질없다.



2024년 12월3일 대한민국 대통령 윤석열이 계엄령을 선포한 이튿날인 4일 새벽 군인들이 서울 국회의사당에 진입하려 하고 있다. 윤석열 대한민국 대통령은 “반국가 세력”이라고 비난하며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지키겠다며 계엄령을 선포했다. AFP연합뉴스

2024년 12월3일 대한민국 대통령 윤석열이 계엄령을 선포한 이튿날인 4일 새벽 군인들이 서울 국회의사당에 진입하려 하고 있다. 윤석열 대한민국 대통령은 “반국가 세력”이라고 비난하며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지키겠다며 계엄령을 선포했다. AFP연합뉴스


내란특검법 제정과 진상조사 잇따라야

윤석열은 도처에 존재한다. 탄핵에 항의하며 정당한 체포영장 집행을 막으려 용산 앞에 도열한 국민의힘 주류의 완강한 방어막 뒤에서, 내란범의 충실한 스피커가 됐던 보수언론의 비호 아래서, 유례없는 시간 단위 구속 기간 산정으로 내란 우두머리를 불구속으로 풀어준 퇴락한 사법부의 용인 아래, 윤석열은 41.15%의 지지율로 여전히 살아 있다.



우리는 이 싸움에서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내란을 종식하자고 41.15%를 모조리 섬멸할 것인가? 윤석열의 방법으로는 윤석열을 없애지 못한다. 모든 이견 집단을 범죄자 집단으로, 체제 전복 세력으로, 반국가 집단으로 규정하는 선악 구도의 적대감으론 윤석열을 이기지 못할 뿐 아니라 내란 세력의 오만과 독선을 정당화하는 밑밥이 되기 십상이다. 정치색을 떠나 국민 통합을 이루겠다는 이재명 대통령의 취임사는 이런 점에서 매우 적확하고 시의적절하다.



“통합은 유능함의 지표이며, 분열은 무능의 결과입니다. 국민 삶을 바꿀 실력도 의지도 없는 정치세력들이 권력 유지를 위해 국민을 편 가르고 혐오를 심는 것입니다. 분열의 정치를 끝낸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국민 통합을 동력으로 삼아 위기를 극복하겠습니다.”(2025년 6월4일 이재명 대통령 취임사 중에서)



나는 이재명 대통령이 ‘정치적 올바름’을 위해 설교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장 ‘실용적’인 방법이라서 내놓은 방안일 것이다. 병마와 싸우려면 내 몸의 면역체계부터 점검해야 하듯이, 진정한 내란 종식을 위해서는 내 안의 윤석열과 싸워야 한다. 적대와 복수는 독성이 강한 항생제와 같다. 체질 개선 없이 항생제만 때려 붓는다고 건강을 되찾지 못한다. 문재인 정부는 적폐 청산을 슬로건으로 내세웠지만 적폐는 청산되지 못했고 몇 년의 잠복기를 거친 뒤 되살아나 윤석열의 수하로 속속 부활했다.



내란특검법 제정으로 엄정한 진상조사가 필요하다. 그러나 환부를 도려내는 시술은 최대한 신속하고 날렵해야 한다. 정작 해야 할 개혁은 지지부진한 채, 그 실적의 저조함을- 적폐든 내란 세력이든- 남 탓으로 돌려서는 죽도 밥도 안 된다. 그래서 첫 100일이 중요하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다음 날인 2024년 12월4일 새벽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시민들이 계엄해제 등을 외치고 있다. 이종근 선임기자

비상계엄이 선포된 다음 날인 2024년 12월4일 새벽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시민들이 계엄해제 등을 외치고 있다. 이종근 선임기자


나라 근간 리셋하는 개헌, 국민 주도로

‘편가르기와 혐오’에서 벗어나 ‘국민 통합을 통한 위기 극복’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통합은 통합 자체를 목표로 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공적 가치를 위해 서로의 마음이 공명할 때 가능하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 금모으기 운동에 줄 서는 이웃을 보며 서로의 마음이 뜨겁게 통했던 것처럼.



‘국민이 주도하는 개헌’은 금모으기처럼 국민의 흩어진 마음과 선한 의지를 크게 모으는 한 방법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개헌을 주장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왜일까? 첫째, 개헌이 국민 일상에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장 먹고사는 일과 무관한 일, 내 삶과 동떨어진 일로 여겨졌다. 이는 국민 탓이 아니다. 국민은 개헌을 논하기엔 너무나 미약한 존재였다. 헌법 조항 하나를 바꾸는 것이 얼마나 많은 변화를 이끄는 토대가 될 수 있는지 말해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엘리트 법학자나 국회의원들의 거대 담론일 뿐, 국민은 개헌안에 대한 찬반 투표 외에 아무 권한이 없었다. 2017년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나 2018년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의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도 정치인과 전문가 중심이었고 그 논의 과정은 국민 앞에 투명하게 공유되지 못했다.



둘째, 개헌은 어차피 ‘안 되는 것’이란 인식 때문이다. 개헌안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과반수의 발의로 국회의원 3분의 2의 동의를 얻은 뒤에야 국민투표에 부쳐지는데, 여야가 바뀔 때마다 개헌 이야기는 철 지난 돌림노래처럼 나왔다 사라지곤 했다.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개헌에 대한 정당 간 입장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38년이 지났다. 1987년 직선제 개헌을 한 이후 일제강점기보다 긴 세월을 거치는 동안 개헌은 필요하나 고칠 수 없는 것으로, 신선하지도 유익하지도 않은 탁상공론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또, 개헌인가? 이제 더는 견딜 수 없는 한계상황에 왔기 때문이다. 갈수록 악화하는 불평등, 기후위기, 저출생, 지역소멸, 인공지능(AI)으로 인한 고용 변화, 보호주의 장벽으로 인한 경제불안, 안보위기 등 복합 위기가 쓰나미처럼 밀려오는데 그걸 제도적으로 해결해야 할 이들은 알량한 자리 보전을 위해 이권 카르텔을 유지하는 데 급급하다. 꽉 막힌 송수로 같다. 그 결과가 윤석열의 등장이고 내란이다. 과두제로 마비된 정치에 피가 돌게 하고 새 숨이 붙게 하려면 나라의 근간을 리셋하는 개헌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방법은 반드시 국민 주도라야 한다.





비상계엄 제한부터 시작하자

개헌은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에게 맡겨서 될 일이 아니다. 서로에게 유리한 개헌안만 고집하다 새 정부 5년을 허송세월할 가능성이 크다. 국민 주도 개헌은 연령별·지역별·성별에 비례해 추첨으로 선정된 보통 시민들이 당리당략을 떠나 더 나은 대한민국을 위한 개헌안의 골자를 만드는 과정이다. 폐쇄적인 필터버블(정보 여과 현상) 안에서 같은 부류끼리만 소통하고 빨간색, 파란색으로 내 편, 네 편을 나누는 진영 논리가 아니라, 국가공동체의 리모델링을 위해 공개적이고 투명한 공론장을 여는 게 국민 통합의 첫걸음이다.



개헌을 단방에 끝내려 하지 않고 쉬운 것부터 순차적으로 진행한다면 그리 어려울 일도 아니다. 우선 개헌절차법을 제정해서 국민개헌의회 구성과 개헌 일정 등을 법으로 명시하는 게 바람직하다. 2025년 5월19일 김종민 의원(무소속)이 대표 발의한 ‘국민참여 헌법개정절차법’에는 7개 정당 의원 17명이 이름을 올렸는데, ‘헌법개정시민위원회’가 시민개헌안을 성안하게 하자는 내용을 담았다. 조국혁신당도 국민참여형 개헌을 추진하고 2026년 지방선거에서 국민투표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개헌절차법을 6월 중에 발의하겠다고 밝혔다.



1차 개헌은 좀 부족하더라도 당장 시급한 것부터 시작할 수 있다.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제한하는 조항, 대통령실을 세종시로 옮기기 위한 행정수도 이전에 관한 조항, 국민이 직접 개헌안을 발의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 국무총리를 국회에서 추천하도록 하는 조항 정도만 다뤄도 좋겠다. 1차 국민 주도 개헌이 성공적으로 성사되면 이후 국민기본권 확대, 생명권과 생태권, 지방분권 강화로, 더 나아가 권력구조와 선거제도에 대한 조항까지 다룰 수 있다. 국민 스스로 개헌 과정에 직접 참여하고 체험하는 것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성장동력이자 국가적인 자산이 된다.



국민주권 강화를 약속한 이재명 정부가 국민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국민을 국가 리모델링에 참여하도록 허용하고 지원하는 일이다. 3년 전 제20대 대선을 앞두고 이재명 당시 후보가 “촛불혁명 직후에 개헌을 해야 했는데 실기했다”고 발언한 것을 상기해주기 바란다. 대통령 임기는 5년이지만 임기 초반에 결행해야 성사되는 일이 따로 있다. 두 번의 실기는 없어야 한다.





이진순 성공회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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