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가 누워 있을 때’ 스틸컷. 배급사 제공 |
최정문 감독의 ‘내가 누워 있을 때’(2025)는 ‘선아’(정지인)와 그녀의 사촌 동생 ‘지수’(오우리) 그리고 지수의 친구 ‘보미’(박보람)가 차례로 잠자리에 눕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각자의 고단한 하루를 보낸 뒤에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지만 쉬이 잠들지 못한다. 침대에 눕기 전 문 쪽을 바라보고 더 단단하게 걸어 잠근다. 혹은 소파에 누운 채 보던 티브이(TV)를 끄고 자려 하지만 이내 다시 티브이를 켜고는 어둠을 물린다. 일상의 불안함은 안전하고 편안해야 할 집 안에서의 취침 시간마저 잠식해 들어온다. 여성들을 향한 남성의 묻지 마 폭행과 데이트 폭력에 대한 뉴스가 라디오와 티브이에서 심심치 않게 흘러나오고, 그들이 머물고 버티는 직장과 학교, 거리 같은 공적인 공간들에서 마주하는 남성들은 그들을 업신여기고 심지어 위협을 가하기도 한다. 유독한 남성들에 둘러싸여 보낸 하루의 무거운 공기가 집 안까지 스며든다.
선아와 지수, 보미에게는 각자의 애착 대상들이 있지만 남성 중심 사회에서는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 혹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된다. 광고 회사에서 일하는 선아는 신입사원 시절, 남자 직원들의 무시 속에서 한달 동안 아무 일도 하지 못한 경험을 잊을 수 없어 성공을 위해 더 발버둥 친다. 그 과정에서 차장인 ‘해수’(김주헌)에게 성적으로 매력을 어필해 동료의 프로젝트를 가로챘다며 꽃뱀 취급을 당한다. 한편 레즈비언으로 정체화한 지수는 고등학생 시절, 혐오와 편견의 시선 때문에 실패한 사랑과 여전히 씨름 중이다. 보미는 무책임한 남자친구에 의해 원치 않는 임신을 하고 곧바로 사산한 딸아이의 환영에 시달린다. 모두가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남성들로부터 받은 상처를 끌어안고 겨우 한발 한발 내딛고 있다.
이들은 과거에 붙들린 채 쉬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다가올 미래를 기대하기보다는 미련이 남은 과거를 자꾸만 돌아본다. 그들이 사로잡혀 있는 부정적 감정은 패배감, 열등감, 우울, 외로움, 비통, 절망, 수치심 등으로 뒤얽혀 있다. 그것은 ‘뒤처짐’으로 포괄할 수 있다. 뒤처져 있는 상태는 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만 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치명적이다. 대신, 천천히 주저하며 걸어가는 만큼 다른 뒤처진 이들과 발맞춰 걸을 수 있다. 비록 더디더라도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서로의 삶을 찬찬히 돌볼 수 있다. 뒤처짐의 상태는 약자들의 연대를 위한 정서적 동력이 된다. 반면에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내달리는 진보의 시간은 유독한 남성들의 전유물이다. 그들은 뒤처진 이들을 함부로 대하고 자신의 성과와 사익을 위해 착취한다. 특히, 과거의 안 좋은 기억을 쉬이 털어내지 못하며 퇴보의 시간을 사는 취약한 여성들은 먹잇감이 된다.
선아와 보미는 지수가 서울로 떠나기 전에 인사차 할머니의 묘소 가는 길에 동행한다. 운전을 맡은 보미가 사고를 일으켜 수습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감정의 골이 깊어지고, 더욱이 자동차 수리비로 바가지를 씌우려는 카센터의 남성 직원들을 상대해야 한다. 세명의 여성들은 그동안 혼자서 감당해 오던 유독한 남성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 용기를 내어 하나가 된다. 승패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애초에 승자와 패자를 나누는 논리는 진보적 시간이 구축해 온 편협한 시각이다. 그래서 영화는 직원들과 부딪히는 결정적인 순간을 건너뛴다. 중요한 건 세명의 여성이 갈등을 극복하고 마침내 유독한 남성들에 맞선 연대를 해냈다는 사실이다. 한편 선아의 직장 선배인 ‘수진’(이상희)은 선아를 착취한 해수의 비리를 까발리는 조력자로 연대한다. 선아의 매력을 매력으로, 노력을 노력으로 인정하며 편견으로 왜곡된 여성의 부정적 이미지를 씻어주며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원래 연대는 자비로운 행위를 한참 넘어서는 적극적인 관계의 실천이다. 자선을 베푼다는 것은 계급적 우위와 일정한 거리감을 전제로 하는 반면에 연대는 상대의 삶을 내 삶 안으로 깊이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그동안 그들은 자매와 친구라는 규정적 관계 안에서 서로를 판단하고 관성화된 위로를 서로에게 건네 왔다면, 그 여정을 통해 그들의 관계는 연대의 층위로 올라선다. 연대 안에서는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의 근거와 조건이 당신이 된다. 뒤처진 자들이 세운 공감의 연대는 무엇보다 견고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진보의 시간을 좇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시간에 발맞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세 여성이 잠자리에 눕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그런데 이번에는 익숙한 집이 아니라 낯선 모텔 방이고 또한 혼자가 아니라 셋이다. 그곳이 낯선 모텔 방이라도 상관없다. 거기가 어디든 그들이 나란히 살을 맞댄 채 체온을 나누며 누워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락할 수 있다. 그들은 긴장을 푼 채 편안한 표정으로 눈을 감는다. 지금껏 해온 인정 투쟁은 바로 이처럼 평온하게 잠들 수 있는 순간, 그저 이 한순간을 위해서인 듯하다. 함께 누워 잠드는 순간, 그것은 여성 연대가 표방하는 감각적 수단이자 이상적 목표를 은유한다.
※손희정 평론가의 개인 사정으로 이번주 ‘H열 15번’ 칼럼은 김경태 영화평론가가 씁니다.
김경태 영화평론가
김경태 영화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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