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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이 4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에서 열린 1호 행정명령 비상경제점검 티에프(TF) 회의에 참석해 머리발언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
‘2580개’
이는 국제통화기금(IMF)이 2023년 미국·중국·유럽연합(EU) 등 75개 지역과 국가에서 발표된 산업 정책 조처를 집계한 숫자다. 미·중 등 거대 국가를 중심으로 특정 산업에 정부 보조금과 대출을 지원하는 등 ‘전략적 밀어주기’ 경쟁이 노골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국제통화기금은 이 같은 통계를 담은 보고서에 ‘산업 정책의 부활’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과거 비효율성과 자원 분배 왜곡의 원흉처럼 여겨졌던 정부의 산업 정책 개입이 정당화될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얘기다. 새 정부도 이런 흐름에 발맞춰 성장의 불씨를 지키고 되살릴 ‘한국형 경제 안보’ 전략의 밑그림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국내 산업이 처한 현실은 절대 녹록지 않다는 경고음은 꾸준히 울리고 있다. 1950년대 경공업, 1960~19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 이후 첨단 산업으로 도약하는 길목에서 초격차(압도적인 격차) 확보 대신 위기감이 팽배해 있다.
그 중심엔 산업 패권 경쟁을 벌이는 미국의 견제와 중국의 추격이 있다. 한국은 호두를 양쪽에서 눌러 까는 기계(넛크래커)에 끼인 호두와 같은 처지다. 대기업의 투자 부진과 현금 유보라는 고질병에 미국의 관세 위협까지 더해지며 국내 제조업 공동화 우려마저 불거지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도 4일 취임 선서 뒤 발표한 ‘국민께 드리는 말씀’을 통해 “보호주의 확대와 공급망 재편 등 급격한 국제질서 변화는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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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최대 수출 품목인 반도체와 자동차는 미국의 공급망 전환 대응과 자체 기술 혁신이라는 이중 난관에 직면해 있다. 권석준 성균관대 교수(화학공학부)는 “반도체 분야에서 한국의 최대 경쟁자는 미국과 일본이 아닌 정부의 집중 지원을 받는 대만과 중국”이라며 “한국 반도체 산업은 초격차의 영광을 뒤로하고 적어도 한 세대 이상 생존 게임을 벌여야만 하는 처지”라고 말했다. 메모리에 견줘 취약한 반도체 설계와 전기차·자율주행 경쟁력 확보 등은 국내 산업 생태계와 인프라 조성이 필수적이다.
인공지능(AI)·배터리·방위산업 등 새로운 성장 산업을 키우고, 조선·철강·화학 등 기존 주력 제조업의 쇠락을 막아야 하는 것도 이재명 정부의 주요 과제다. 이름을 밝히길 꺼린 한 정부 관계자는 “비싼 인공지능 칩(GPU·그래픽처리장치)을 대규모로 사들여 자체 인공지능인 거대언어모델(LLM)을 개발하는 식으로 미국을 따라잡을 수 있는지 의문”이라며 “과거 슈퍼컴퓨터를 구축해놓고 제대로 쓰지 못한 것처럼, 중요한 건 칩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원경 울산과학기술원 교수 겸 글로벌산학협력센터장은 “윤석열 정부는 ‘민간 주도 성장’이라는 너무 당연한 말만 내세우고, 경제 안보 측면의 공급망 관리나 주력·최첨단 산업 육성 등 큰 틀의 전략을 짜지 못했다”며 “세계무역기구(WTO)도 경제 안보 목적의 보조금을 허용하는 만큼, 실용주의적 경제 안보관을 반영한 ‘한국형 경제 안보’라는 개념과 정책 방향을 명확히 하고 그 틀 아래에서 정부와 민간이 협력하는 게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각 산업 분야가 처한 현실과 과제를 국익 중심의 ‘경제 안보’라는 최상위 목표 아래 구체적인 정책 수단으로 담아내는 게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이는 업계가 요구하는 감세나 규제 완화 등을 정부가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수용하는 주먹구구식 정책과는 차원이 다른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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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해야 하는 건 이런 산업 정책이 중장기 청사진과 치밀한 계획보다는 단기적인 정치적 입김에 휘둘릴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실제 국제통화기금도 “각국의 사례 분석 결과, 선거가 다가오는 국가에서 산업 정책 조처를 사용할 가능성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며 “이는 경제 외에도 정치적 동기가 산업 정책의 강력한 결정 요인이라는 의미”라고 짚었다. 산업 정책도 인기영합주의에 휘둘릴 수 있다는 뜻이다.
권남훈 산업연구원 원장(건국대 교수)은 “정부 산업 정책의 근본적인 목적은 경제의 기초체력인 잠재성장률을 높이는 것”이라며 “무조건 중국을 따돌리자는 식보다 우리의 경쟁력을 일정 수준 유지하며 새로운 분야를 발굴해 성장 동력이 꺼지지 않게 한다는 목표에 맞는 세부 전략을 지속적으로 논의하고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종오 기자, 산업팀 종합 pjo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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