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오스 난민촌에서 태어나 캐나다에서 자란 작가 수반캄 탐마봉사(왼쪽)의 어린 시절. 작가의 공식 누리집 |
표제작 ‘나이프를 발음하는 법’에서 어린 딸은 집에서 유일하게 읽을 수 있는 아버지에게 영어 단어 ‘knife’의 발음법을 물어본다. 아빠는 단어를 골똘히 바라보다 “카-나-아이-프으, 카나이프.”라고 발음한다. 다음날 아이는 수업 시간에 아버지가 가르쳐준 대로 그 단어를 발음했다가 교장실로 불려간다. 단지 ‘k(케이)’가 묵음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맨 앞에 있는 걸요! 첫 글자잖아요! 소리가 있어야죠!”
수반캄 탐마봉사는 라오스계 캐나다 시인이자 소설가로 1978년 태국 농카이에 있는 라오스 난민촌에서 태어났다. 시를 먼저 쓰기 시작하며 문학계의 인정을 받았고 뒤이어 쓴 소설로 여러 문학상의 후보에 오르거나 수상했다. ‘나이프를 발음하는 법’에는 이민자, 여성, 어린이, 노인 등 다양한 소수자의 삶이 간결한 문장으로 담겨 있다. 인물의 대다수가 라오스 난민 출신이지만 모든 인물의 불행과 고통을 납작하게 강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가는 묵음의 자리를 강요당한 인물들이 어떤 독특한 소리로 그 묵음을 대체하는지에 관심을 보인다.
나이프를 발음하는 법 l 수반캄 탐마봉사 지음, 이윤실 옮김, 문학동네(2025) |
‘랜디 트래비스’에서 라오스에서 캐나다로 온 가족은 난민 정착 프로그램의 환영 선물 상자를 받는데, 그중 엄마가 가장 아낀 건 라디오였다. 아빠가 직장에 가고 ‘나’가 학교에 간 사이 엄마는 내내 라디오를 듣는다. 엄마가 특히 좋아한 건 미국의 컨트리 음악이었고 그중에서도 랜디 트래비스였다. 첫 월급을 받은 아빠는 기념으로 필수품 아닌 사치품을 사고 싶어 하고 고심 끝에 엄마를 위해 레코드 플레이어를 산다. 엄마는 기다려야 하는 라디오보다 듣고 싶은 노래를 곧바로 들을 수 있는 레코드 플레이어의 통제력을 사랑한다. 오직 음악, 그것도 랜디 트래비스의 노래에 푹 빠진 엄마는 집안일도 신경 쓰지 않고 가족이 좋아하는 라오스식 음식을 만들지도 않는다. 영어를 쓸 줄 모르는 엄마는 ‘나’에게 랜디 트래비스에게 보낼 편지를 쓰게 하는데, 엄마가 불러준 ‘당신을 영원토록 사랑합니다’라는 말 대신 ‘나’는 ‘당신이 싫어요’라고 쓴다. 사랑을 침묵으로밖에는 표현할 줄 몰랐던 아빠마저 랜디 트래비스처럼 청바지와 플란넬 셔츠를 입고 카우보이 부츠를 신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의 노래를 부르지는 못해 엄마에게 실망감을 안겨준다. 시간이 흘러 엄마는 랜디 트래비스가 아닌 카지노에 집착하기 시작하고 얼마 후 카지노 주차장에서 죽음을 맞는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르고 중년이 된 ‘나’는 노인이 된 아빠를 방문하는데, 두 사람은 함께 라오스식 식사를 하고 우연히 티브이(TV)에서 랜디 트래비스 특집 방송을 본다. 놀랍게도 아빠는 이제 그의 노래를 부를 수 있다.
어느 컨트리 음악 가수를 향한 엄마의 집착은 낯선 세계를 향한 적응이었을까. 원래의 자신을 잃지 않으려는 안간힘이었을까. 작가는 엄마라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제시하지만, 소설 속에서 묵음의 자리에 소리를 가장 열심히 채워 넣는 사람은 엄마다. 그 자리에는 늘 컨트리 음악이 흐르고 간간이 라디오 방청객의 웃음소리가 끼어들기도 한다. 그때마다 분명 엄마도 소리 없는 웃음을 크게 웃었을 것이다. 그 역설을 통해 작가는 말하는 듯하다. 이 세상에 진짜 묵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주혜 소설가·번역가
▶▶[한겨레 후원하기] 시민과 함께 민주주의를!
▶▶민주주의, 필사적으로 지키는 방법 [책 보러가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