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지원 고려대 심리학부 교수 |
그렇게 제 안의 대나무숲의 골이 깊어지던 어느날, 저는 수업 중에 ‘인간이어서 불가피하게 찾아오는 질병과 사고와 실패들이 마음 안에 지옥을 만들면, 우리는 이제부터 그걸 끌어안고 사는 거예요. 어른이니까’라는 말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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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불가피한 슬픔과 불안
억지로 없애려다 더 우울해져
끌어안고 앞으로 나아가야
일러스트=김지윤 |
나도 모르게 너무 부정적인 이야기를 던진 것은 아닐까. 나한테야 오래전부터 여러 사람과 함께 길어 올린 지혜였고 버틸 수 있는 사실이고 사람들 안의 지옥을 함께 버텨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지만, 이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을까. 지옥을 끌어안고 사는 어른의 삶이라는 것이 혹여 무력하게 들리지는 않았을까.
그런데 그때 학생들은 작게 끄덕였습니다. 아. 너희들도 벌써 자신만의 지옥을 눈치채고 있었구나. 아마 그때 우리는 나 자신과 서로를 모두 측은하고 짠하게 여겼을 겁니다. 겉으로 평온해 보이거나 자신만만해 보이거나 혐오하거나 우울한 듯 보이거나, 그 마음 안에는 겉으로 보아서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조용히 품은 지옥이 있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다가도 어떤 날 어떤 시간 그 지옥은 우리 모든 마음과 생을 무서운 속도로 빨아들입니다. 방금까지 느꼈던 아주 약간의 안도와 행복감이 나의 진짜 인생은 아니니까, 하며 순간의 기쁨을 밀어내고 마음 안에서는 싸움이 시작됩니다. 나의 우울이나 불안, 증오와 뒤엉킵니다. 내 마음의 문제를 어떻게든 제거하고 해결하려 합니다. 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문제해결적 마음’이 켜진 것입니다.
물론 어떤 마음의 문제들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관점에서 차근차근 접근하면서 해결할 수도 있습니다. ‘이건 사실이 아니고 나의 생각일 뿐이야. 나의 생각은 내가 아니야.’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날 가능성은 희박해.’ 그렇게 나의 마음의 지형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해결적 마음이 과도해지는 경우 나 자신이나 세상에 대해 더 큰 부정적 감정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나의 문제해결적 마음이 지나치게 투쟁 모드로 들어가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제거’하려 할 때입니다. 내 부정적 감정이 내 결함처럼 느껴지는 때입니다.
그러나 우울과 불안과 쓸쓸함을 몰아내려 이미 수많은 시도를 해보았을 것이지만 사라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동안 실은 내 생에서 잃어가는 것이 더 많아집니다. 혹시라도 더 큰 부정적인 감정이 몰려오지 않도록 도전해 볼 가치가 있는 일들에서 쉽게 뒤로 물러납니다. 자신을 위해 정말 해야만 하는 일을 계속해서 미루거나 중도 포기합니다. 가장 원하지 않는 길을 가기 시작합니다. 진솔하지 못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만나거나 피하거나 술을 마셔 마음을 흐리게 합니다. 이런 유독한 시도와 실패들이 다시 우리 마음에 새로운 지옥을 만듭니다. 이제는 나의 우울이 우울하고 나의 불행이 불행합니다.
부정적 감정을 마음 안에서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한 목표입니다. 그래서 부정적인 그 무엇도 느끼지 않으려 하는 것을 ‘죽은 사람의 목표’라고도 말합니다. 죽은 이가 산 자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것이니까요. 살아있는 사람들, 그 중에도 지혜로운 사람들은 마침내 부정적인 감정을 마음 안에 모두 품어버립니다. 살아있는 내가 끌어안아 버리면 안아지는, 내 측은한 나의 기억과 감정들입니다.
둘러보면 살아 있는 이들 모두가 각자 슬픈 순간들을 품고 어떻게든 제 갈 길들을 가고 있는 중입니다. 사라지지 않을 슬픔을 다루는 자신만의 지혜를 찾으셨다면 언젠가는 그 지혜를 저 혹은 다른 누군가에게 나누어주실 수도 있겠지요. 저도 이곳에 팁을 하나 두고 갑니다. 저는 제 마음 안 지옥에게 어른이 되어 주기로 결심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품고 있었던 좋은 어른의 모습을 떠올려 내 안의 상실감과 슬픔을 대하고자 했습니다.
경계를 설정해서 내가 해도 되는 일과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을 분명히 할 것. 나의 책임인 것과 아닌 것을 분명히 할 것. 그리고 내가 먹고 싶은 것을 한 달에 한두 번쯤 사 먹이고, 내가 원하는 일에 하루에 두어 시간쯤 몰입하고, 주변의 가장 약한 마음과 내 안의 가장 약한 마음을 돕는 어른의 모습으로 나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실은 우리는 어떤 슬픔도 불안도 없는 어른을 꿈꿔 본 적 없습니다. 그 모든 마음을 끌어안고 앞으로 가기를 선택할 뿐입니다. 어른답게, 어른으로서.
허지원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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