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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앤트 상장 때 따자"던 와인 잠든 곳…아시아 최대 셀러 가보니

머니투데이 베이징(중국)=우경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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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앤트 상장 때 따자"던 와인 잠든 곳…아시아 최대 셀러 가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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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동부 옌타이 쥔딩 와이너리...아시아 최대규모 와인셀러엔 와인과 스토리가 가득

쥔딩 와이너리 지하 와인셀러. 약 3000여개의 오크통이 보관돼 있다./사진=우경희 기자

쥔딩 와이너리 지하 와인셀러. 약 3000여개의 오크통이 보관돼 있다./사진=우경희 기자


지하 11m 깊이 와인셀러(저장·숙성고)로 내려가는 길은 한참이었다. 엘리베이터 안 공기에 배어 느껴지는 누룩 냄새가 구수하고 은은했다. 취재진이 찾은 5월 중순은 이제 막 뻗어나온 덩굴에 포도 꽃이 맺히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포도가 영글고, 수확이 이뤄지고, 본격적으로 와인이 생산되는 9~10월엔 와이너리 전체에 포도향이 가득할 것으로 예상된다.

와인셀러의 문이 열렸다. 1층에서 만들어진 와인들이 옮겨져 때론 짧고 때론 길게 휴식하며 맛의 깊이를 더하는 곳이다. 어두운 조명 탓이기도 했지만 워낙 넓어 쉬이 끝이 보이지 않았다. 셀러 면적만 축구장보다 넓은 8000㎡다. 세계 최대인지는 확인을 못 했지만 아시아 최대인 것까지는 확인했다고 한다. 3000여개의 오크통이 각자 와인과 스토리를 품고 늘어서 있었다. 장관이었다.

중국 동부이자 한국과 가장 가까운 지역인 산둥성 옌타이(연태) 펑라이 소재 쥔딩(군정)와이너리. 국제 와이너리 기준에 따라 건설된 중국 최초 와이너리다. 2007년 개장했고 총 투자액만 10억위안(약 1910억원)이 넘는다. 처음엔 정부 지분이 있었지만 철수해 이젠 순수 민간 소유다. 골프장과 와이너리, 리조트가 결합된 세계에 유례 없는 곳이다. 한국에서도 관광객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중국 1세대 소믈리에로 유명한 샤오쉐둥 쥔딩(군정) 와이너리 총경리가 와이너리 포도밭에서 포도 생육조건을 설명하고 있다./사진=우경희 기자

중국 1세대 소믈리에로 유명한 샤오쉐둥 쥔딩(군정) 와이너리 총경리가 와이너리 포도밭에서 포도 생육조건을 설명하고 있다./사진=우경희 기자


'시간과 장소의 기록'이라 불리는 게 와인이다. 스토리를 빼놓고는 설명이 어려운 술이라는 거다. 쥔딩 와인셀러에 있는 오크통들 속 와인들도 스토리를 가득 담고 있었다. 대형 건설사 완커, 글로벌 IT기업 레노버, 워너브라더스차이나 대표들이 구입해 서명해놓은 오크통들이 연이어 보인다. 유명 배우이자 량차오웨이(양조위)의 아내 류자링(유가령)도 와인을 여러통 구입하고 이름을 적어놨다.

알리바바 클라우드(현 알리바바 클라우드인텔리전스그룹)가 구입한 오크통에도 사연이 있다. 당시 CEO였던 후샤오밍으로 추정되는 서명이 2017년 6월 날짜로 오크통에 남아있는데, 앤트그룹(알리바바 핀테크 자회사) 상장 성공 축하파티에서 마시자며 구입했단다. 그러나 앤트그룹 상장은 잘 알려진 대로 마윈 창업주 설화로 무산(2020년)됐다. 이 오크통이 열릴 날은 일단 기약 없이 미뤄진 상태다.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니 병입 후 숙성 중인 와인들이 산더미처럼 적재돼 있었다. 이르면 6개월가량 숙성 후 출고된다. 와이너리가 만들어지기도 전인 2005년에 병입된 와인도 있다. 곰팡이를 방지하기 위해 이 지역은 전체 셀러 대비 습도를 다소 낮게 유지하고 있다. 셀러 입구엔 벽면 가득 개인 와인저장고들이 있다. 우리나라 인구만큼 부자가 많다는 중국 부자들의 고급 취미생활 현장이다.


알리바바 클라우드가 2017년 구입한 와인. 이 오크통은 언제 열릴 수 있을까./사진=우경희 기자

알리바바 클라우드가 2017년 구입한 와인. 이 오크통은 언제 열릴 수 있을까./사진=우경희 기자


중국의 대표적 와인 산지는 서북부 내륙 닝샤와 동부 옌타이다. 프랑스 보르도, 미국 나파, 스페인 리오하, 이탈리아 토스카나, 조지아 카헤티 등 세계적 와인 산지와 북위도가 37~42도로 대체로 일치한다. 이 지역이 포도 재배에 적합한 일조량과 일교차를 갖춘 '와인벨트'(Wine Belt)다. 유명 와인브랜드 모에샹동이 닝샤에, 세계 최고 부자가문 로스차일드가 옌타이에 와이너리를 둔 것도 이 때문이다.

닝샤는 건조한 대륙성 기후에 황허의 수자원이 풍부해 일찍부터 중국 내 대표적 와인산지가 됐다. 옌타이도 마찬가지다. 담쟁이덩굴이 무성한 쥔딩 와이너리 정문을 통과한 후 펼쳐지는 야트막한 구릉으로 둘러싸인 분지는 농업 문외한인 기자의 눈에도 아늑하고 포근해 보였다. 거센 바닷바람은 구릉에 부딪혀 사철 부드럽게 불어온다. 겨울철에도 혹한이 없다. 일조량이 충분하고 토양엔 미네랄이 많다.

포도밭의 긴 역사도 와인의 만듦새에 한 몫을 한다. 중국 소믈리에 1세대로 유명한 샤오쉐둥 쥔딩 와이너리 총경리는 "땅 위로는 키가 50cm밖에 안 되는 포도나무도 파보면 뿌리가 10m에 이르는 경우가 있다"며 "뿌리가 깊이 파고들다보면 땅속 광물과 만나고 이 성분이 포도에 담겨 독특한 와인 향으로 이어진다. 오래된 포도나무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인 것은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왕이얼 쥔딩 와이너리 대표가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사진=우경희 기자

왕이얼 쥔딩 와이너리 대표가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사진=우경희 기자


중국인들의 바이주(백주) 사랑은 유명하다. 중국 시총 1위가 최고 명주 마오타이 제조사일 정도다. 그런 중국에서 바이주 소비량이 줄어들고 있다. '술에 취하는 게 더이상 쿨하지 않다'(소버 큐리어스)고 여기는 젊은 층의 인식변화 때문이다. 그 틈을 치고드는 건 바로 와인이다. 코로나19와 관세 문제로 매년 소비량이 들쭉날쭉하긴 하지만, 중국은 이미 세계 10대 와인 소비국이다.

작년 기준 중국 와인시장은 약 86억달러(약 12조원)로 추산되는데, 전년 대비 1.8% 성장했다. 중국 정부도 와인을 새로운 경제 성장 동력 중 하나로 설정했다. 중국 내 와인 생산의 30%가량을 차지하는 닝샤를 중국 최초 '특생산업 종합시험구'로 지정하고 와인 산업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중국산 와인은 2022년 기준 21만3700㎘ 생산됐는데, 2024~2028년 연평균 복합 성장률이 12.6%로 예상된다.

아직 대부분 수입이지만 중국산 와인의 인지도는 중국 내에서 시나브로 높아진다. 또 하나의 신대륙 와인이 될 수 있다. 쥔딩 와이너리 주인 왕이얼 대표는 꿈이 더 크다. 그는 "와이너리에 투자한 돈을 부동산에 투자했다면 큰 부자가 됐을 것"이라며 "당장 수익을 내는 것보다 100년 후에도 지금처럼 와인을 생산하며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와이너리를 만드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베이징(중국)=우경희 특파원 cheerup@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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