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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연애’가 아이돌의 커리어를 망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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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연애’가 아이돌의 커리어를 망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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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 첫 정규 앨범 ‘아마겟돈(Armageddon)’으로 활동한 에스파. 에스엠엔터테인먼트 제공

지난해 5월 첫 정규 앨범 ‘아마겟돈(Armageddon)’으로 활동한 에스파. 에스엠엔터테인먼트 제공




여기, 케이팝과 함께 자란 이들이 있다. ‘최애’가 몇 번 바뀌는 동안 케이팝은 세계 음악 시장을 흔드는 장르가 되었고 국익을 거론하는 거대한 산업으로 성장했다. 앞으로도 이렇게 ‘장밋빛 전망’만 가득할까? 물음표가 남는다. 기획사는 수익에만 매달리고, 팬덤은 덕질을 가장한 노동으로 지쳐간다. 사건사고도 반복된다. ‘케이팝, 사랑과 탈출 사이’는 케이팝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불편하지만 꼭 필요한 질문을 던지고 대안을 함께 고민한다.





끊임없이 사건·사고가 발생하는 케이팝 세상이지만, 지난해 카리나의 열애설이 났을 때를 생각하면 여전히 마음이 복잡하다. 카리나를 향해 시시각각으로 날카롭고 저열한 말들이 쏟아졌고, 팬들의 반응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렀고, 나는 어떤 말에도 동의할 수 없었다. 나는 카리나가 내가 보고 있는 댓글들을 볼까 봐, 버블(팬 소통 플랫폼)로 온갖 비난을 받고 있을까 봐, 밥도 못 먹고 울고 있을까 봐 종일 마음을 졸였다. 닿을 수 없겠지만 분명하게 말해주고 싶었다. 언젠가는 우리가 멀어질 수도 있고, 내가 너의 팬이 아닌 날도 오겠지만, 너의 연애가 그 이유가 될 수는 없다고.



에스파는 여성 팬의 비율이 높은 편이지만 그렇다고 팬덤이 페미니즘적인 성격을 띤다고 볼 수는 없다. 페미니즘은 누군가에게 으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실천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걸 절절하게 실감한 시간이었다. 아이돌의 열애설에 늘 따라붙는 ‘내가 너한테 쓴 돈이 얼만데’라는 말이 어김없이 등장했다. 지겹다. 도대체 그래서 뭐? 이러한 소비주의 논리는 우리에게 좋을 게 하나도 없고, 오직 소속사의 배를 불릴 뿐이다. 아이돌과 팬은 소모되고, 소속사만 이득을 취한다.



구매력은 팬심을 증명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소비할 수 없거나, 소비를 조장하는 산업의 방식을 거부하는 팬을 배제하는 건 결국 산업의 방식에 순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상화와 착취가 만연한 케이팝 산업에서 돈을 쓴 사람에게만 말할 권리가 주어진다면 그것만큼 끔찍한 일이 또 있을까? 우리가 아이돌의 어떤 모습을 소비하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소비자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한편 카리나가 에스파의 커리어를 망친다는 의견도 있었다. 요즘 인기 걸그룹이 얼마나 많은데, 카리나가 연애를 해서 1등을 못 하면, 그러니까 에스파가 ‘1군’으로 자리 잡지 못하면 어떡하냐는 건데… 정말로 ‘연애’가 에스파의 커리어를 망치는 걸까? ‘연애가 아이돌의 커리어를 망친다’는 생각이 에스파의 커리어를 망치는 건 아닐까? 연애·결혼·출산·육아로 인해 여성들이 일자리를 잃지 않는, 경력이 단절되지 않는 세상을 꿈꾼 건 나뿐이었던 걸까? 연애 하나로 누군가의 삶이 타격을 받고 무너진다면, 그건 이 모양 이 꼴인 세상 탓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아이돌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아이돌로서 말할 수 있는 목표 말고, 인생에서 진정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멋대로 가늠할 뿐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건 어느 시상식의 이름만 긴 부문에서 수상하는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좋아하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는 것일 수도 있고,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팬들이 등을 돌리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팬들은 ‘우리의 목표’를 위해서 아이돌이 삶에서 누릴 수 있는 많은 부분을 뒤로 미루는 게 당연하다고 단정 지어 버린다. 매일 그들의 행복을 바라면서도 말이다. 팬들은 ‘성공’을 위해 아이돌을 통제하고자 한다. 그럼 빌보드 차트에서 1위를 하면 연애해도 되는 걸까? 그때는 빌보드 1위까지 했는데 연애하는 게 말이 되냐고 할 거면서?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가 행사하고야 마는 폭력이 있다.



‘버블 효녀(팬들과 성실하게 소통하거나 팬들의 피드백을 빠르게 반영하는 아이돌을 효녀 혹은 효자로 부른다)’로 알려진 카리나에게 성실성이나 진정성을 지적하는 팬들도 있었다. 팬들은 아이돌이 기대하던 모습과 다른 모습을 보였을 때 진정성을 따지고, 사과문을 요구한다. 아무리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은 ‘자컨(자체 콘텐츠의 줄임말로, 소속사가 직접 기획하고 제작한 영상 콘텐츠)’을 제공한다고 해도, 결국 우리는 서로가 ‘보여주는’ 모습을 볼 수밖에 없다. 아이돌과 팬뿐만 아니라 사람 관계라는 게 어느 정도 다 그렇지 않은가.



이러한 팬들의 의견에 비판적인 입장이지만, 팬들을 함부로 판단하고 싶지 않다는 게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빠순이’ 경력 20년 차로서, 이런 말도 저런 말도 다 어떤 마음에서 비롯된 건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팬들은 이미 ‘빠순이’라는 이름으로 쉽게 폄하 당하고, 이런 일이 있을 때면 “누가 그렇게까지 좋아하래?”라는 소리를 듣는다. 팬들의 애정 방식은 정말로 다양해서 나는 그들이 ‘돈만’ 쓰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돈과 시간은 세어볼 수 있지만, 마음의 크기와 깊이는 누구도 헤아릴 수 없다. 사실 팬들도 다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돈만으로 우리의 사랑을 증명하는 일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말이다.



케이팝 산업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과 끝까지 감시하고 싶은 마음,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마음 사이에서 여전히 갈팡질팡한다. 그래도 다행인 건, 케이팝 산업이 아무리 쓰레기 같은 짓을 벌여도 ‘팬’이라는 필터를 거쳐야 한다는 거다. ‘대중’만으로는 유지할 수 없는, ‘팬’이 있어야 하는 산업 안에서 어떤 실천을 할 것인지는 우리의 몫이다.



나는 ‘돈’이 기준이 되는 산업의 방식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그만두는 연습을 하고 있다. (애초에 돈도 없지만) 자본주의 문법 밖에서 팬으로서 존재하는 방법을 탐색 중이다. 누군가는 그게 무슨 팬이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의심은 이제 알 바가 아니다.



아이돌을 나와 같은 노동자로 바라보고, 산업의 노동 환경을 감시하고, 자본으로 점철된 ‘미감’에 쉽게 환호하지 않고, 산업 내 극소수만이 누리는 막대한 부가 이름 붙일 수 없는 노동을 하는 이들에게 재분배되고,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에 있던 모든 이들의 이름이 크레딧에 오르고, 스스로 원하는 삶의 방식을 택했다는 이유만으로 사과문을 쓰지 않는 세상이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가 서로를 갉아먹지 않는 사랑을 하게 될 거라고 믿는다.



힘껏 사랑하고 그 사랑의 방식을 의심하면서, 팬들과 공명하고 또 불화하면서 이곳에 존재하고 싶다. ‘빠순이’의 사랑은 호락호락하지 않지만, ‘빠순이’도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 나는 산업의 방식에 복종하지 않는 만만찮은 존재로 이곳에 있을 것이다.



한겨레 누리집 ‘오늘의 스페셜’ (https://www.hani.co.kr/arti/SERIES/3268) 코너에서 이어집니다.



일석·뉴스레터 ‘편협한 이달의 케이팝’ 발행인, 그리고 울면서 케이팝하는 페미니스트.





‘케이팝, 사랑과 탈출 사이’ 전문한겨레 ‘오늘의 스페셜’ 코너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네이버, 다음 등 포털뉴스 페이지에서는 하이퍼링크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시면 주소창에 아래 링크를 복사해 붙여넣어보세요!)



1화: ‘오빠’들은 툭하면 ‘빠순이’의 뒤통수를 때린다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188526.html?h=s



2화: 나의 최애, 빌보드 1위 하면 연애해도 되나요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189758.html?h=s



3화: 팬의 ‘공짜 노동’은 진화한다…더 빠르게, 더 짧게, 더 자주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191075.html?h=s



4화: ​‘탈케’와 ‘어덕행덕’ 사이…‘케이팝적 번아웃’이 온다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192242.html?h=s



5화: ‘노오력’ 해서 ‘육각형 아이돌’ 되면 행복할까요? 육각형이 끝일까요?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193424.html?h=s



6화: 돈 주고 살게요…최애의 모든 날, 모든 순간을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194623.html?h=s



7화: ‘노동착취 없는 케이팝’ 상상불가능한 세계를 상상하기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196955.html?h=s



8화: 케이팝 공연장에서 응원봉 없이 응원할 수 있을까
https://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198119.html?h=s





*‘케이팝, 사랑과 탈출 사이’는 ‘케이팝 하는 여자들’과 ‘들불’, 한겨레가 공동 기획한 연재입니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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