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
-마쓰이에 마사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중에서.
길거리에 대선 벽보가 어지러이 붙어있지만 기대보다 한숨이 나오는 건 나뿐인가. 이럴 땐 차라리 정갈한 문장으로 도망치자. 푸른 숲 표지의 이 책을 펼쳐 들자 맑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오랜만에 숨이 트였다.
한 청년 건축가가 경외하는 노 건축가와 함께 일한 날들을 그린 소설이다. 건축과 자연, 예술과 일상에 대한 “명석하고 막힘 없는 언어 구사”로 “부드러운 애무 같은 독서감을 선사한다”(소설가 가와카미 히로미)는 평을 받았다. 위 인용문 속 무라이의 건축 미학은 작가 마쓰이에의 소설 미학과도 통하는 듯하다.
두 번째 페이지의 일부를 옮겨본다.
“해가 뜨기 얼마 전부터 하늘은 신비한 푸른빛을 띠며, 모든 것을 삼킨 깊은 어둠 가운데에서 순식간에 숲의 윤곽이 떠오른다. 일출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아침은 싱겁게 밝아온다. 침대에서 일어나 가운뎃마당에 면한 작은 유리창 블라인드를 올린다. 안개. 어느 틈에 어디에서 솟구쳤는지 하얀 덩어리가 계수나무 가지와 잎사귀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움직인다. 조용했다. 새도 포기하고 지저귐을 그만두었나 보다. 유리창을 열고 코를 멀리 밀듯이 얼굴을 내밀고 안개 냄새를 맡는다. 안개 냄새에 색깔이 있다면 그것은 하얀색이 아니라 초록색일 것이다.”
등장인물 무라이 슌스케는 김수근의 스승인 요시무라 준조가 모델로 알려진다. 2013년 요미우리문학상 수상작.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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