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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의 미디어 아티스트이자 연구자인 호 루이 안의 영상 설치 작품 ‘역사의 형상들과 지능의 토대’(2024).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
‘야, 내가 단어를 불러줄 테니 네가 그 단어에 맞는 이미지를 그림으로 그려볼래?’
2022년 11월 생성형 인공지능(AI) 챗지피티가 등장한 직후였다. 싱가포르에서 작업해온 미디어 작가 호 루이 안은 챗지피티를 상대로 흥미로운 실험적 작업을 시도했다. 유명한 인공지능 기반 이미지 생성 엔진 ‘스테이블 디퓨전’(Stable Diffusion: 안정적 확산)의 영문 철자를 그대로 불러주고 큰 그림으로 옮겨보라고 지시한 것이다.
결과는 뜻밖이었다. 에이아이는 곧바로 큰 마굿간 건물에 여러 마리의 말들이 나가거나 들어오고 있는 목가적 풍경을 그려냈다. 작가는 그림을 보다 흠칫 전율했다. 영단어 ‘스테이블’은 ‘안정적인’이란 뜻의 형용사로 통하지만, ‘마굿간’이란 다른 뜻이 있었다. 이걸 인공지능이 간파하고 마굿간 건물에 말들이란 생명체를 끌어들여 모이고 흩어지는 장면을 그려내 확산한다는 의미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마굿간은 지붕과 벽체 곳곳이 뒤틀려 위태한 이미지까지 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인공지능 기반의 이미지들이 아직 확정적인 창작물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과도기적 양상까지도 회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사실 이런 정도라면 에이아이가 예술가의 창의력 차원까지 근접했다고 볼 수 있을 터다. 1년여 뒤 작가가 똑같은 단어에 대한 그림을 재차 주문하자 에이아이가 마굿간과 전혀 다른 추상적인 이미지들만 내놓았다는 사실도 그렇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코리아나미술관의 국제기획전 ‘합성열병’(6월28일까지)의 지하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 호 루이 안의 영상 설치 작품 ‘역사의 형상들과 지능의 토대’(2024)는 이런 에이아이 예술의 권능을 담아 만들어졌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작가의 주문을 받아 그려낸 마굿간 속 말들의 대형 화폭 패널을 배경으로, 인공지능에 대한 작가의 강연 내용을 소개하는 2개의 모니터 화면을 펼쳐 보여주는 얼개다. 모니터 화면의 강연 내용은 인공지능의 정보 학습 과정과 네트워크 시스템, 사회적 권력과의 관계 등을 담고 있는데, 역시 생성형 인공지능을 통해 실시간 형상 이미지가 되어 풀려나온다.
‘합성열병’전은 지난 수년간 에이아이가 인간의 사회와 문화예술 생태계에 미친 변화와 인간의 감성적 반응을 주목한다. 국내외 소장 작가 9명이 내놓은 사진, 회화, 미디어설치 등의 신작들을 통해 이런 양상을 깊이있게 보여주려 한 이슈성 기획전이다. 전시 제목은 프랑스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1995년 펴낸 저서 ‘아카이브 열병’(Archive Fever)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데리다가 책에서 아카이브를 두고 과거를 보존하는 공간 차원을 넘어 기억과 망각, 권력과 욕망이 뒤얽힌 역동적인 장, 곧 열병의 개념틀로 풀이한 것처럼, 기획진은 생성형 에이아이 시대 ‘합성 미디어’(synthetic media) 환경으로 열병의 개념틀을 넓혀 전시를 펼친다. 전시의 핵심 개념 ‘합성’이 인간의 정보를 배우고 재구성하는 작업을 거듭해 진화하는 에이아이 메커니즘을 상징한다면, ‘열병’은 에이아이의 기술적 성취가 진전되면서 생긴 불안과 모호함 등을 가리킨다.
실제로 인공지능이 빚어내는 그림과 글들은 최근 미술 시장은 물론 미술관과 갤러리 등에서도 예술의 영역으로 짓쳐들어오고 있다. 작가들이 명령어를 입력하고 클릭 몇번 하면 뚝딱 이미지가 나온다. 이런 시대상에서 국내외 예술가들은 무엇을 고민하고 탐구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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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과 네덜란드를 오가며 활동 중인 요나스 룬드가 생성형 인공지능을 활용해 만든 단채널 영상물 ‘어떤 것의 미래’(The Future of Something, 2023)의 한 장면.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
스웨덴과 네덜란드에서 활동 중인 요나스 룬드가 생성형 인공지능을 활용해 만든 단채널 영상물 ‘어떤 것의 미래’(The Future of Something, 2023)의 한 장면. 인공지능이 일상 생활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2030~2040년 근미래 시점에서 상담 모임에 온 사람들의 가상 대화 모습들을 보여준다. 인공지능과 공존할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견뎌야 하는 소외감과 갈등, 불안, 정체성의 변화 등을 예측한 작품이다. 눈코입이 일그러진 사람들이 모여 우울한 이야기를 나눈다. 인공지능 때문에 일자리를 잃거나 소외감을 겪는 사람들인데, 영상에서 이들을 바라보는 건 사람의 눈이 아닌 에이아이의 시선이라는 것이 착잡한 감회를 갖게 만든다.
에이아이 작곡가를 써서 노래 만들고 재기를 꿈꾸는 왕년의 슈퍼스타 이야기를 극장식 공간에서 풀어내는 중국계 작가 로렌스 렉의 영상물은 기묘한 흥취를 안겨준다. 지하 전시장 말미에 상영 중인 장진승 작가의 단채널 영상물 ‘깊은 성찰: 스펙트럼 해독자’(2025)는 전시의 결론처럼 다가오는 작품이다. 인공지능 기기를 탑재하면서 전쟁 기계로 변모해가는 인간 병사의 모습 등을 냉혹한 분위기의 컴퓨터그래픽 화면들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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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전시장 말미에 상영 중인 장진승 작가의 단채널 영상물 ‘깊은 성찰: 스펙트럼 해독자’(2025)의 한 장면.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
인간의 주체성과 예술가로서의 정체성, 데이터 추출과 편향, 에이아이 환각, 유령노동 등을 주제로 한 문제적 작품들이 수두룩하다. 김현석, 방소윤, 양아치, 장진승, 정영호, 로렌스 렉, 요나스 룬드, 프리야기타 디아, 호 루이 안 등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실력파 작가들이 참여했다. 인공지능과 공동 집필한 소설을 오디오 설치 형식으로 공개하거나 인공지능을 둘러싼 물리적 환경과 에이아이의 범용화가 인간의 주체성에 미치는 영향 등을 탐구하는 등 전시와 출품작들의 틀거지가 색다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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