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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프만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2030 세상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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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프만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2030 세상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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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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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의 패치는 크게 너프와 버프로 나눌 수 있습니다. 너프란 특정 캐릭터나 아이템이 지나치게 강할 때 일부러 성능을 낮추는 조치를 말합니다. 게임 내 밸런스를 위해 제작자는 능력치를 깎아서 균형을 맞춥니다. 반대의 개념으로 버프가 있습니다. 너프와 달리 상향해주는 방식입니다. 이런 너프와 버프는 게임 안에서 다양성을 증진시키는 동시에 게임의 수명을 늘리는 효과적인 수단입니다. 우리가 아는 유수의 게임들은 끊임없는 패치로 밸런스를 잡아갔습니다.

현실에서도 패치는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너프입니다. 어떤 집단의 영향력이나 혜택을 줄여 균형을 맞추려는 정책으로 등장하곤 했습니다. 의대 정원 확대가 대표적입니다. 더 많은 의사를 뽑아 공급을 늘리면 의료 접근성도 나아지고 기대수익도 낮아져 의대 선호 현상도 개선될 것이라 기대했지만, 돌아온 건 거센 반발과 의료 현장의 파괴였습니다. 대형마트 의무 휴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통시장을 살리겠다며 마트를 닫았지만, 시장이 살아났다는 증거는 없고, 소비자 불편만 커졌습니다. 다주택자 규제 역시 집값 안정이란 명분 아래 추진됐지만, 오히려 시장 불안을 부추겨 가격 상승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규제의 정당성만으로 채워진 정책은 결국 의도하지 않은 파도를 일으키고, 그 파도에 휩쓸리는 것은 늘 가만히 있는 환자, 소비자 그리고 시민들입니다.

너프 일변도의 정책은 효과가 없습니다. 하지만 정치인들이 너무나 좋아합니다. 바보여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영악하기 때문입니다. 특정 집단을 악으로 규정하면 반사적으로 선한 피해자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들을 혼내주겠다'는 구호는 단순하고 명쾌하며 박수받기 좋습니다. 의사들을 기득권으로 몰아세운 대통령, '적폐'나 '기득권'이라는 단어로 정체 불명의 적을 설정한 정치인들 모두 너프의 전략을 활용하며 지지세를 불려왔습니다. 대상을 악마화할수록 자신은 구원자로 비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현실은 계속 단순화되고, 갈등은 소모적으로 재생산됩니다.

게임은 너프만으로도 밸런스를 잡을 수 있습니다. 그때그때 인기 있는 캐릭터와 아이템의 성능을 하향하면 새로운 것들이 주목받기 때문이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양한 이해관계와 미묘한 균형 위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일방적인 상향과 하향이 아닌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인센티브 구조가 필요합니다. 작년부터 각광받아온 일본의 '밸류업 정책'은 자산시장 개혁을 목표로 기업 세금혜택, 우수 밸류기업 별도 지수 편입, 개인 비과세 제도 등 여러 인센티브를 도입했습니다. 진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 이상에 현실을 끼워 맞추기보다 이처럼 현실에서 출발한 설계가 필요합니다.

이 글을 쓰며 다시 생각했습니다. 정치는 결국 시스템을 설계하는 일이라는 것을요. 누군가를 벌주거나 손들어주는 것만으로 사회는 변화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다수 국민의 삶이 조금 더 나아지고, 사회의 지속가능성이 높아지는 구조를 짜는 사람, 그런 정치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실패를 봐왔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조금 더 나은 설계, 조금 더 지속가능한 유인으로 움직이는 사회를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회의 균형은 억제가 아니라 설계로 완성됩니다.


구현모 뉴스레터 어거스트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