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금곡동 행정복지센터에서 제21대 대통령 선거 책자형 선거공보물 발송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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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병변장애와 하지장애 등을 가진 신체장애인 문진영(42)씨는 3년 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온몸을 써’ 한표를 행사했다.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여지는 팔다리와 뇌병변 약 복용으로 생긴 손 떨림 증상을 참아가며 세로 1㎝ 길이의 좁은 칸 안에 지름 0.7㎝인 도장을 겨우 찍어 넣었다. 문씨는 27일 한겨레에 “온몸에 긴장이 들어간 상태라 작은 칸 안에 투표를 하기 힘들었다”며 “기표란을 크게 만들 수는 없는 것이냐”고 호소했다.
21대 대통령선거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지만, 여전히 장애인 참정권 보장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우선 휠체어 이용자가 접근할 수 없는 ‘승강기 없는 2층 투표소’ 문제가 여전하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중앙선관위)가 서미화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21대 대선 전국 사전투표소 3568곳 중 198곳은 2층 이상인데도 승강기가 설치되지 않았다. 중앙선관위는 “승강기가 없는 경우 1층에 임시 기표소를 설치하겠다”고 했다.
기표소까지 이른다 해도 새로운 장벽이 나타난다. 중증지체장애인 이규식(56)씨는 “기표소까진 들어갔지만 (휠체어에 앉은 상황에서) 도장 찍는 곳이 높았고, 작은 칸에 도장을 찍기도 어려웠다”고 했다. 중앙선관위는 이에 대비해 투표 도장을 쉽게 찍을 수 있는 장비(특수형 기표용구(레일버튼형))를 각 투표소에 비치하지만, 그 존재를 아는 장애인은 드물다. 문진영씨는 “처음 들어보는 용구”라며 “선거 전에 신체장애인은 이런 용구를 신청할 수 있다는 안내라도 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3월 충남 천안 남서울대학교 지식정보관에서 열린 충남선관위 주최로 발달장애인 대상으로 투표체험 행사가 열려 참석자들이 특수형 기표용구를 체험하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
발달장애인들은 글자와 숫자로만 이뤄진 공보물과 투표용지를 받고 이해하기 어려워 당황했던 경험을 입을 모아 전했다. 충북 청주에 사는 발달장애인 정현우(34)씨에겐 길고 어려운 문장들로 채워진 선거공보물을 이해하는 것부터 장벽이었다. 그는 “얼마 전 대통령선거 공보물을 받아봤는데 인공지능(AI) 시대를 열겠다는 말부터 잘 이해가 안 됐다. 전체 내용의 절반은 이해하지 못한 상태”라고 말했다.
시각장애인용 점자 공보물이 공직선거법상 의무인 것과 달리 발달장애인용 공보물은 의무 사항이 아니다. 서미화 의원은 발달장애인용 공보물을 의무화 해 이들의 참정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국회에 계류된 상태다. 서 의원은 “법 개정 뿐 아니라 장애인이 배제되지 않는 선거를 위한 주무부처 선관위의 적극적인 노력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공보물을 읽고 찾아간 투표소에서도 정씨를 둘러싼 투표 장벽은 이어졌다. 역시 한글과 숫자 뿐인 투표용지 속 이름과 자신이 투표하고자 한 후보를 연결짓느라 기표소 안에서 1시간을 머물렀다고 한다. 정씨는 “뒤에서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서 그냥 아무것도 안 찍은 백지를 내고 왔다”며 “사진이나 그림이 들어간 투표용지가 필요하다”고 했다.
신체·시각 장애인의 경우 공직선거법에 따라 투표 보조인의 조력을 받을 수 있지만, 발달장애인은 이 법에서도 제외돼 보조인 도움도 받을 수 없다. 경기 수원에 사는 발달장애인 전해은(27)씨는 “지난해 총선 때도 투표장에서 보조인의 도움을 받고 싶다고 했지만 시각 장애인과 신체 장애인만 가능하다며 거절당했다”며 “혼자 기표소에 들어갔는데 뒤에서 ‘오래 걸린다’고 욕하는 소리를 듣고 눈앞이 하얘져 도망치듯 나왔다”고 말했다.
충북피플퍼스트센터가 도입을 요구한 그림 투표용지 본보기. 충북피플퍼스트센터 제공 |
선관위는 ‘발달장애인 투표 편의제공 내용’에 대해 “투표절차를 쉽게 설명한 책자를 제작해 장애인거주시설·복지관 등에 배부하고 투표소에서 선거인 및 투표사무원 간 의사소통 보조도구로 활용할 수 있는 투표가이드북을 제작해 비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다만 발달장애 당사자들은 책자를 만들어 비치하는 것보다, 투표보조를 허용하고 쉬운 선거공보물과 그림투표용지를 도입하는 것이 더 실질적인 ‘편의제공’이라고 입을 모았다.
발달장애인들이 쉬운 선거공보물과 그림 투표용지를 제공해달라며 제기한 소송에서 지난해 12월 서울고법은 “정당 로고와 후보자 사진 등을 이용한 투표 보조용구를 제공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중앙선관위의 상고로 사건은 대법원으로 넘어갔고, 여전히 투표소에서 그림으로 된 투표용지는 제공되지 않는다. 발달장애인 소송을 대리하고 있는 이수연 법조공익모임 ‘나우’ 변호사는 “(장애인) 당사자들은 후보들을 판단할 기회조차 박탈당하고 있는 것”이라며 “장애인차별금지법에 이미 발달장애인의 투표 참정권을 보장하고 있으며, ‘정당한 편의를 제공하라’는 조항이 있다. 쉬운 공보물이나 그림투표 용지가 도입되면 발달장애인뿐 아니라 경계선 지능인 등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고나린 기자 me@hani.co.kr 이나영 기자 ny379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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