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동타격대원 애처로운 삶, 영화로도 제작 전망
[서울=뉴시스] 박태홍 기자 = 소총으로 무장한 시민군이 1980년 5월 23일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는 외곽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박태홍 뉴시스 편집위원이 1980년 당시 한국일보 사진기자로 재직 중 5·18 광주 참상을 취재하며 기록한 사진을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에 즈음해 최초로 공개한다. (사진=한국일보 제공) 2020.05.17. hipth@newsis.com |
[광주=뉴시스]이영주 기자 = 5·18민주화운동 45주기를 맞아 1980년 5월27일 계엄군에 맞서 최후 항전에 나섰던 '기동타격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내란범으로 내몰렸다가 복권됐지만, 어려운 생계를 잇다 외로이 숨지는 등 항쟁에 투신했던 이들의 기구한 일대기에 대한 뒤늦은 조명이 이어지고 있다.
27일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 종합보고서 등에 따르면 기동타격대는 1980년 5월21일 계엄군의 광주시민 대상 금남로 집단 발포 이후 자발적으로 형성된 시위대 내 기동순찰대가 모태다.
기동순찰대는 집단발포 이후 계엄군이 물러난 광주에서 치안을 도맡았다. 항쟁지도부는 계엄군이 옛전남도청을 공격하러 올 것에 대비해 26일 기동순찰대를 기동타격대로 재편성했다. 당시 모인 기동타격대원의 수는 훗날 구술 작업 과정을 통해 35명으로 잠정 파악됐다.
기동타격대는 각자 번호를 매기고 별명을 쓰도록 했다. 시내 순찰, 군 동태 파악에 나서며 대비한 기동타격대는 27일 새벽 계엄군과 맞섰다.
27일 새벽 기동타격대 등 시민군이 계엄군과 벌인 최후 항전 끝에 옛전남도청에서는 25명이 숨지고 193명이 체포됐다.
기동 타격대원들은 도청을 비롯해 순찰 구역에서 체포됐다. 체포된 이들의 등에는 특수 폭도, 극렬분자, 총기 소지자 등의 문구가 적혔다. 이후 계엄사령부는 불과 15여시간 기동타격대로서 임무를 수행한 이들에게 짜맞춘 듯 내란죄를 적용했다.
훗날 유공자로 인정받았지만 여생은 녹록치 않았다. 모진 고초로 몸과 마음이 닳을대로 닳았다. 매달 정부에서 지급하는 일정 수준의 수급비와 광주시에서 5·18 민주유공자에게 주는 보훈예우수당 10만원으로 생계를 간신히 유지해왔다.
급기야 외로운 죽음도 이어졌다. 지난 9일에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기동타격대에 자원했던 고(故) 김재귀씨가 자택에서 홀로 숨진 채 발견됐다. 생존 대원들의 배웅 속에 안장된 그의 묘비에는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간 5·18 기동타격대 7조원 여기 잠들다'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서울=뉴시스] 박태홍 기자 = 광주 금남로 일대에서 시민군과 계엄군 사이에서 유혈 충돌이 벌어진 1980년 5월 21일(부처님오신날) 봉축탑이 서 있는 전남도청 앞 분수대 광장에서 연일 민주항쟁 범시민궐기대회가 열리고 있다. 총탄에 찢기고 부서진 봉축탑이 그날의 혈전을 말해주는 듯하다. 박태홍 뉴시스 편집위원이 1980년 당시 한국일보 사진기자로 재직 중 5·18 광주 참상을 취재하며 기록한 사진을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에 즈음해 최초로 공개한다. (사진=한국일보 제공) 2020.05.17. hipth@newsis.com |
기동타격대원들의 애처로운 삶은 영화로서 재조명될 전망이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연출한 진모영 감독의 지휘 아래 최후 항전이 벌어진 5월27일 당시가 영상화된다.
영화 기획은 5·18 당시 목숨을 내던진 사람들 대다수가 학업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좋은 직장도 가지지 못한 '기층민중'이었다는 점에서 시작됐다.
기동타격대 등 기층민중이 벌인 5·18 항쟁이 12·3 비상계엄 당시 국회로 달려나간 시민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는 뜻도 담겼다.
뒤늦은 조명에도 기동타격대는 묵묵히 45년 전 진실을 위한 발걸음에 앞장서고 있다.
양기남 5·18 기동타격대동지회장은 "나이 어리고 학력과 소득이 낮은 사회 기층민들이 5·18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뭉쳤다. 앞으로도 5·18의 진실을 알리는 일이라면 앞으로도 무엇이든 발 벗고 나설 생각"이라고 밝혔다.
☞공감언론 뉴시스 leeyj2578@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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