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버지니아 샬러츠빌에서 2017년 8월12일 인종주의를 지지하는 극우 성향 지지자들이 남북전쟁 때 남부군 장군인 로버트 리의 동상 철거를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이들은 미국의 인종주의 단체인 ‘큐 클럭스 클랜’(KKK)이 흑인 처형 때 했던 횃불 의식이나 나치식 경례를 했다. 유에스에이투데이 누리집 갈무리 |
도널드 트럼프 2기 미국 행정부의 인종주의가 노골화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1일 워싱턴 백악관에서 시릴 라마포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과 정상회담 도중 남아공에서 백인 농부들이 대량학살 당하고 있다는 음모론을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다음날인 22일 트럼프 행정부의 디이아이(DEI, 다양성·평등성·포용성) 탄압에 반기를 든 하버드대에 대해 외국인 학생의 등록을 불허한다고 발표했다.
즉각 남아공 백인 집단학살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미국 언론들 보도가 나오고, 외국인 학생 등록 불허 결정도 하버드대가 낸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인 법원의 판결로 몇시간 만에 효력이 정지됐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은 지난 1월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에서 벌어지는 인종주의가 노골적인 수준으로 치달았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특히, 트럼프 2기 행정부 인종주의 핵심인 다양성과 반유대주의에 대한 반대가 잘 드러난 사건이다.
트럼프주의 인종주의 뿌리
트럼프는 1970년대 부동산 사업을 할 때부터 인종주의적 행태로 구설에 올랐다. 그가 운영한 부동산 회사는 흑인 세입자를 차별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은 적이 있다. 그는 정치권을 기웃거리던 1990년대부터 인종주의적 주장을 했다. 그는 1989년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일어난 백인 여성 성폭행 사건 범인으로 체포됐으나 2002년에 무죄로 석방된 흑인 5명을 진범이라고 2024년까지 주장했다. 그는 하와이에서 태어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미국 영토에서 태어나지 않아서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음모론을 퍼뜨린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2016년 대통령 선거 때 멕시코 이민자들을 싸잡아 성폭행범이라고 막무가내로 비난했다. 또, 선거 토론 때 “정치적 올바름(PC)을 박살 내겠다”고 말해, 반다양성 정책의 뿌리를 보여줬다. 정치적 올바름은 1980년대 이후 미국 사회에서 소수자 배려 문화와 가치를 일컫는 말로, 다양성 정책과 짝을 이룬다.
트럼프의 주장은 자신들이 미국의 주인인데 비백인이나 이민자들보다 사회경제적으로 처지가 나쁘다는 불만을 품고 있는 백인 저학력 중하류층의 지지를 받았다. 이후 백인민족주의와 미국의 국제적 역할을 부인하는 미국우선주의를 주축으로 하는 ‘트럼프주의’로 발전한다.
트럼프 1차 집권(2017년 1월~2021년 1월)으로 수면 위로 다시 올라온 미국의 인종주의는 2017년 8월12일 버지니아 샬러츠빌에서 일어났던 폭동으로 전기를 맞았다. 남북전쟁 당시 남부군을 이끌었던 로버트 리 장군 동상 철거를 반대하는 시위에 ‘큐 클럭스 클랜’(KKK) 등 전통적인 백인우월주의 단체뿐만 아니라 네오나치, 대안우파 등 새로운 인종주의 세력들이 몰려들었다. 유색인종 및 이민자 반대뿐만 아니라 ‘유대인은 백인을 대체할 수 없다’는 반유대주의 구호까지 외쳤고, 사상자가 발생했다.
트럼프는 이 폭동에 대해 “양쪽에 문제가 있고, 양쪽에 모두 괜찮은 사람들이 있다”며 시위를 주도한 인종주의적 극우세력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반유대주의 시위에 놀란 유대인 사회에서 거센 역풍이 일어났다.
트럼프는 이를 계기로 반유대주의에 대한 반대를 자신의 정치 도구로 재장착했다.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미국 기독교 복음주의 세력을 확고한 지지층으로 묶어두기 위해서도 반유대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난 표명이 절실하기도 했다.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을 반유대주의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다양성·반유대주의 반대의 결합
이때부터 트럼프주의의 인종주의는 다양성 및 반유대주의에 대한 반대가 주축이 됐다. 트럼프가 2020년 대선에서 낙선하고, 이듬해인 2021년 1월 조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한 뒤 다양성 정책이 강화되자, 트럼프 지지층과 백인 보수 세력 내에서는 불만이 고조됐다.
‘다양성(diversity), 평등성(equality), 포용성(inclusion)’의 앞글자를 딴 디이아이(DEI) 정책은 인종·젠더·민족 등 정체성을 차별하지 않고 사회적 기회를 제공한다는 정책이다. 길게는 19세기 미국의 노예해방 이후, 본격적으로는 1960년대 미국의 민권운동 이후 진행된 반차별 정책의 성과이다. 특히,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이 2021년 1월20일 취임 첫날 최초의 다양성 증진 행정명령에 서명함으로써, 미 정부의 공식 정책으로 격상됐다.
트럼프와 지지층들은 디이아이 정책이 인종·젠더·민족 정체성에 바탕을 둔 차별이라고 역공했다. 채용이나 입학 등에서 인종 등을 배려해, 능력 있는 백인이 오히려 차별당하는 게 현실이라고 트럼프 쪽은 주장했다. 2020년 체포 과정에서 경찰의 폭력에 의해 사망한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건 이후, 인종·젠더 등의 차별 실태를 파악하고 반대하는 ‘각성’(woke)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에 반발하며 반다양성 주장은 커졌다. 각성 운동이 인종 차별 현실 인정을 강요하고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죄책감을 심는다고 주장했다.
그해 대선에 재선을 위해 출마한 트럼프는 반각성·반다양성 운동을 자신의 선거운동 포인트로 삼았다. 보수적인 싱크탱크인 맨해튼연구소의 선임연구원 크리스토퍼 루포가 “연방정부에서 좌파 인종주의를 척결하는” “대항혁명 청사진”을 제시했다. 그는 이 청사진에서 “트럼프는 행정명령으로 이런 프로그램을 종식할 수 있고, 다양성을 인종을 고려 않는 엄격한 평등성 정책으로 대체할 수 있다”며 “이런 조처는 관료제에 즉각적인 충격을 줄 것”이라고 제안했다. 루포는 2020년 여름부터 트럼프 대선캠프의 정책팀과 교류했다고 밝혔다.
트럼프는 2020년 대선에서 낙선했으나, 그의 낙선이 부정선거 때문이라고 분노한 지지층들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운동으로 결집하며 강화됐다. 2023년 10월 가자전쟁 발발은 트럼프주의에게 반유대주의 반대를 인종주의로 활용하는 문을 활짝 열었다. 가자전쟁 이후 미국 대학가에서 불붙은 반이스라엘-친팔레스타인 시위를 반유대주의로 규정했다.
반유대주의는 서방 기독교 세계에 뿌리 깊은 유대인 차별 및 탄압이다. 그런데 미국의 보수적 유대인 세력과 공화당은 팔레스타인 주민을 학살하는 이스라엘의 가자전쟁 반대를 반유대주의로 등치시켰다. 트럼프는 이를 적극 활용했다. 다양성과 반유대주의를 등치시켰다.
트럼프 행정부의 인종주의 질주
재집권에 성공한 트럼프는 취임 첫날인 지난 1월20일 첫 행정명령을 바이든 행정부의 다양성 행정명령을 폐기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트럼프는 이런 반다양성 정책에 기초해 지난 2월 흑인인 미군 합동참모의장 찰스 브라운을 경질했다. 그가 바이든 전 행정부의 다양성 정책에 따라 능력이 없는데도 합참의장이 됐다고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은 주장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반다양성 프로그램은 대학을 상대로 극대화됐다. 다양성 정책 폐기 및 반이스라엘-친팔레스타인 시위 방지 대책을 보고하고 실시하라고 요구하고, 이를 어기면 대학에 대한 보조금 등 연방정부 지원 삭제를 추진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요구에 가자전쟁 반대 시위의 진원지인 컬럼비아대를 시작으로 미국 대학들이 굴복했다.
하지만 하버드대가 지난달 트럼프 행정부의 요구를 정면 거부하면서, 국면이 달라졌다. 유대인인 앨런 가버 하버드대 총장은 “정부가 언급한 일부 요구는 반이스라엘주의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나, 대부분은 하버드의 ‘지적 환경’에 대한 직접적인 정부 규제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트럼프 행정부는 즉각 22억9000만달러(약 3조3000억원) 규모의 지원을 중단했다. 하버드의 저항 선언 뒤 다른 대학들도 동참해, 트럼프 행정부와의 대치 전선이 커졌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이후 실세로 등장했던 억만장자 일론 머스크도 정부효율부 수장을 맡아, 정부 조직 축소 및 공무원 감원에 반다양성 프로그램을 동원했다. 남아공 출신인 머스크는 남아공에서 백인 주민들이 차별받고 토지를 박탈당하고 있다는 주장을 거듭했다. 트럼프도 취임 이후 남아공에서 백인들이 토지를 몰수당하는 등 차별이 벌어진다고 주장했다.
하버드대에 대한 외국인 학생 등록 불허 조처는 법원의 본안 심리에서도 기각될 확률이 확실하다고 전망된다. 그런데도 트럼프 행정부가 이를 밀어붙이는 것은 지지층 결집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미국 사회에서 인종주의를 둔 갈등과 분열이 다시 점화됐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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