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한국일보 언론사 이미지

“에이징커브가 뭔가요?”…‘역대급 역주행’ 강동윤 9단의 독한 행마

한국일보
원문보기

“에이징커브가 뭔가요?”…‘역대급 역주행’ 강동윤 9단의 독한 행마

속보
이노스페이스 상업 발사체 한빛나노 세우고 추진제 충전
바둑계 ‘은퇴각’인 30대 중반에 최전성기
꾸준한 온라인 대국으로 다진 실전 경쟁력
절실함 결여된 후배들에겐 뼈아픈 쓴소리
“‘반상(盤上) 오프 로드’ 도전은 계속될 것”


15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에서 만난 강동윤(36) 9단은 올 들어 질주 중인 ‘역대급 역주행’과 관련된 비결을 묻는 질문에 “입단 이후 국내외 주요 프로 기사들과 최소 10만 판 이상을 소화한 인터넷 대국으로 언제나 실전 감각을 유지하고 있다”라고 귀띔했다. 강 9단은 바둑계에선 ‘은퇴각’으로 여겨진 30대 중반임에도 지난 3월부터 이달 현재까지 국내 랭킹 3위를 3개월째 고수, ‘에이징커브’(시간 흐름에 따른 기량 저하) 컨트롤에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박시몬 기자

15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에서 만난 강동윤(36) 9단은 올 들어 질주 중인 ‘역대급 역주행’과 관련된 비결을 묻는 질문에 “입단 이후 국내외 주요 프로 기사들과 최소 10만 판 이상을 소화한 인터넷 대국으로 언제나 실전 감각을 유지하고 있다”라고 귀띔했다. 강 9단은 바둑계에선 ‘은퇴각’으로 여겨진 30대 중반임에도 지난 3월부터 이달 현재까지 국내 랭킹 3위를 3개월째 고수, ‘에이징커브’(시간 흐름에 따른 기량 저하) 컨트롤에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박시몬 기자


“이젠 그렇게 못 하죠. 그땐 정신 무장 차원이었습니다만 지금은 좀…”

민망한 분위기부터 연출됐다. 혈기 왕성했던 10~20대 당시 종종 선보인 수도승 헤어스타일과 관련된 질문에 돌아온 그의 답변은 ‘대략 난감’으로 요약됐다. 쓰라린 패배 이후엔 대국장에 삭발로 등장,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악동’이란 별명까지 얻었던 강동윤(36) 9단도 세월의 흐름 앞에선 생각이 달라진 듯했다. 지난 15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에서 만난 강 9단은 어색한 표정과 함께 그때나 지금이나 부족하긴 마찬가지란 뉘앙스로 말문을 열었다. “아직도 (제 자신에게)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이 많아요. 그만큼 보강해야 될 것도 많습니다. 언제 (개인 기전) 우승을 했는지, 이젠 기억조차 가물가물합니다.” 최고 주가를 올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강 9단 자신의 눈높이엔 여전히 모자라단 자책으로 읽혔다.

바둑계에선 ‘에이징커브’ 시점인 30대 중반에 찾아간 최전성기



강동윤 9단은 2016년 당시 ‘제20회 LG배 조선일보 기왕전’에서 우승, 6년 전 타이틀을 차지했던 ‘제22회 후지쯔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에 이어 두 번째 세계 메이저 기전 우승컵 획득에 성공했다. 한국기원 제공

강동윤 9단은 2016년 당시 ‘제20회 LG배 조선일보 기왕전’에서 우승, 6년 전 타이틀을 차지했던 ‘제22회 후지쯔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에 이어 두 번째 세계 메이저 기전 우승컵 획득에 성공했다. 한국기원 제공


본인에겐 야박했지만 강 9단은 요즘 국내 바둑계 최고의 ‘블루칩’으로 통하면서 또다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이미 2차례 세계 메이저 기전(제22회 후지쯔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2009년), 제20회 LG배 조선일보 기왕전(2016년)) 타이틀 획득과 더불어 전성기를 누렸던 강 9단이었기에 다소 의외란 시각도 나올 법하지만 그의 최근 반상(盤上) 행보를 감안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강 9단은 당장 국내외 바둑계에서도 난제였던 경쟁력 갖춘 현역 연장의 꿈을 현실 속에서 몸소 실현시키고 있다. 무엇보다 바둑계에선 불문율처럼 여겨진 ‘30대 중반이면 찾아온다’는 ’에이징커브’(시간 흐름에 따른 기량 저하) 시점을 완벽하게 컨트롤하고 있다. 실제 올해 강 9단은 그동안 반상 족보에도 없었던 ‘역대급 역주행’ 모드만 고집 중이다. 그는 올해 24승7패(승률 77.42%, 25일 기준)로 지난 3월부터 꿰찼던 국내 프로 랭킹 3위 자리를 이달까지 3개월째 고수하고 있다. 이는 30대 중반엔 노쇠 기미를 보이면서 하향세로 접어들었던 바둑계 전례에 비춰볼 경우엔 지극히 이례적이다. 지난 2012년 5월, 자신의 국내 랭킹 최고치였던 3위 자리를 1개월 만에 물러났던 흐름과 비교하면 강 9단의 최전성기는 현재인 셈이다. 비결을 물었지만 강 9단의 반응은 아리송했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프로에 들어온 이후, 제 생활은 똑같거든요. 크게 달라진 건 없습니다.”

‘롱런’ 비결은 지독한 꾸준함…입단 이후, 13년간 고수들과 온라인 실전 대국 10만 판 이상



4일 국내 최대 기전인 ‘2024~25 KB국민은행 바둑리그’(우승상금 2억5,000만 원) 챔피언결정전에서 마한의 심장 영암팀에 승리, 최종 우승을 확정한 신생팀 영림프라임창호 소속의 강동윤(오른쪽) 9단이 박정상 감독과 함께 소감을 밝히고 있다. 바둑TV 유튜브 캡처

4일 국내 최대 기전인 ‘2024~25 KB국민은행 바둑리그’(우승상금 2억5,000만 원) 챔피언결정전에서 마한의 심장 영암팀에 승리, 최종 우승을 확정한 신생팀 영림프라임창호 소속의 강동윤(오른쪽) 9단이 박정상 감독과 함께 소감을 밝히고 있다. 바둑TV 유튜브 캡처


수수께끼는 이내 덧붙여진 강 9단의 귀띔에서 풀렸다. “실전 이상의 공부는 없다는 게 제 지론입니다. 실전 감각 유지를 위해 인터넷 대국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오프라인 대국을 제외하고 온라인에서만 최소한 (국내외 주요 프로기사들과) 10만 판 이상은 둔 것 같습니다. 실전 대국 종료 이후에만 가능한 복기도 저에겐 큰 공부입니다.” 결국 2002년 입단 이후, 13년 동안 한결같이 고수해온 지독한 꾸준함이 오늘날 자신도 모르게 강 9단만의 차별화된 경쟁력으로 내재됐던 셈이다.

30대 중반인 강 9단 입장에서 체력 단련은 기본이라고 했다. “체력적인 부분에 문제가 생기면 10~20대 젊은 선수들과 몇 시간씩 진검승부를 벌일 수 없어요. 매일 러닝머신과 헬스클럽에서 시간을 보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매 판 두뇌 풀가동이 필수인 실전 대국에서 체력 저하에 따른 집중력 부족으로 승부를 망치고 싶진 않아서였다.

강 9단의 이런 노력은 지난 4일 마무리된 국내 최대 기전인 ‘2024~25 KB국민은행 바둑리그’(우승상금 2억5,000만 원)에서도 빛을 발했다. 신생팀인 영림프라임창호 주장으로 출전한 그는 팀의 ‘2024~25 KB리그’ 정규시즌과 챔피언결정전 통합 우승을 주도했다. 대부분 10~30대 초반의 후배들로 구성된 ‘2024~25 KB리그’에서 다승왕(12승3패)을 차지한 강 9단은 사실상 이번 시즌 최우수선수(MVP)도 예약했다.

“10대 후반~20대 국내 기사들의 부진은 고민”…”세계대회 우승에도 재도전할 것”



15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에서 만난 강동윤(36) 9단이 국내 최대 기전인 ‘2024~25 KB국민은행 바둑리그’(우승상금 2억5,000만 원) 챔피언결정전에서 승리한 마한의 심장 영암팀 소속의 안성준 9단과 벌였던 대국을 복기하고 있다. 박시몬 기자

15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에서 만난 강동윤(36) 9단이 국내 최대 기전인 ‘2024~25 KB국민은행 바둑리그’(우승상금 2억5,000만 원) 챔피언결정전에서 승리한 마한의 심장 영암팀 소속의 안성준 9단과 벌였던 대국을 복기하고 있다. 박시몬 기자


강 9단의 저력은 세계 바둑 랭킹 1위인 신진서(25) 9단과 관계에서도 확인된다. 통산 상대 전적에선 7승16패로 열세이지만 최근 10경기에선 4승6패(25일 기준)로 선전했다. 신 9단이 강 9단을 암암리에 본인의 ‘킬러’로 인정하고 나선 배경이다.

K바둑계에선 드물게 30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상승세인 강 9단은 상대적으로 아쉬운 대목도 짚었다. “개인적으론 제 연차에 국내 랭킹 3위인 성적이 나쁠 건 없습니다만 바둑계 전체를 고려하면 생각하면서 넘어가야 할 지점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특히 가장 성적을 내야 할 10대 후반에서 20대 기사들의 부진은 고민해야 될 부분입니다. 건강한 세대교체가 그만큼 지연되고 있단 반증이기도 하니까요.” 프로 바둑 기사가 반드시 갖춰야 할 절실함이 결여됐단 판단에서 나온 베테랑의 쓴소리였다. 비슷한 또래의 중국 프로 기사들이 세계 1인자인 한국의 신 9단에게 맹렬한 공세를 펼치고 있는 국면도 감안된 지적으로 들렸다.

이런 상황까지 염두에 둔 목표치였을까. 강 9단은 공격적인 향후 청사진도 제시했다. “언제까지 제가 바둑판 앞에 앉아서 바둑을 둘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현역으로 활동하는 동안엔 세계 대회 우승 도전은 계속해서 시도해야죠. 후배들이나 바둑팬들에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던 기사로 기억되고 싶거든요.” 시간을 거꾸로 돌리면서 또다시 ‘반상 오프 로드’ 개척에 들어간 그의 끈질긴 행마에선 치열함이 역력했다.

허재경 선임기자 ricky@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