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와 이준석 개혁신당 대통령 후보. 국회사진기자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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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을 앞두고 ‘호텔경제학’ 논란이 점입가경이다. 민생을 위한 정책 공약 경쟁과 논쟁 대신, 난데없이 경제학 공방만 벌이는 셈이다. 이 논란이 불거진 배경과 역사적 맥락, 진위 여부 등을 짚어봤다.
호텔경제학이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 쪽이 든 비유를 두고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가 낮춰 부르며 만든 말이다. 한 여행객이 마을의 호텔에 낸 예약금 10만원이 돌고 돌아 지역 상권에 활기가 돌게 된다는 이야기가 뼈대다.
이 호텔경제학의 ‘원조’는 2017년 19대 대선 경선 당시 후보로 나선 이재명 성남시장의 지지자가 만든 그림이다. 이를 이 시장이 기본소득·지역상품권(지역화폐) 등 정책을 홍보할 목적으로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리며 대중에게 처음 소개됐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2017년 2월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그림. ‘호텔경제학’ 논란을 낳은 원인이 됐다. |
이 그림을 ‘인터넷 조롱 수준의 밈(meme·온라인 유행어)’이라 비판한 이준석 후보의 말은 사실과 다르다. ‘미국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린 어빙 피셔 예일대 교수가 1930년대 대공황 당시 이와 비슷한 사례를 들며 지역화폐(스탬프 스크립) 도입을 촉구한 바 있기 때문이다.
실제 피셔 교수가 쓴 글의 일부다.
“한 외판원이 작은 마을의 호텔 점원 A에게 100달러짜리 지폐 한장을 보관해달라며 24시간 뒤 찾으러 오겠다고 했다. 채무자 Z에게 받을 돈이 있었던 A는 이 돈으로 B에게 진 빚 100달러를 갚았고, B는 다시 C에게, C는 D에게 채무를 상환했다. 돈이 돌고 돌아 결국 Z가 점원 A에게 100달러를 갚자 A는 아침에 외판원에게 돈을 돌려줬다. 그런데 외판원은 이 돈으로 담배에 불을 붙이며 “(이 지폐는) 위조품”이라고 했다.”
피셔가 언급한 지역화폐는 매주 수요일마다 지방자치단체로부터 개당 2센트짜리 우표를 사서 지폐 뒷면에 붙여야만 다음 일주일 동안 돈으로 쓸 수 있다. 사람들이 모두 돈 쓰기를 꺼리는 불황기에 지폐를 갖고 있으면 사실상 세금을 내게 해 돈의 유통 속도를 높이는 것이다. 실제 대공황 당시 미국의 일부 지자체가 이러한 방식의 지역화폐를 도입하기도 했다.
다만 이 지역화폐(스탬프 스크립)는 이재명 후보가 말하는 지역화폐와는 성격이 다르다. 국내 지역화폐는 지폐를 갖고 있는 사람이 벌칙으로 세금을 부담하는 게 아니라, 정부와 지자체가 재정을 지원해 이를 할인 판매하는 구조여서다.
예컨대 지역 주민은 10만원짜리 지역화폐를 9만원에 살 수 있다. 스탬프 스크립과 달리 시간이 지나도 가치가 줄지 않는 까닭에 ‘돈이 도는 효과’도 기대에 못 미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후보의 지지자가 사람들이 서로 빚을 갚아 마을의 채무가 모두 청산된다는 기존 비유를 ‘실물 소비’로 바꿔 표현하는 바람에 “10만원이 생겼다고 이 돈을 다 쓰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논란(재정 지출의 국민소득 증가 효과)을 불필요하게 초래한 측면도 있다.
한국은행이 지난해 12월 펴낸 ‘한국은행과 지급결제제도’ 책자의 한 대목. |
이재명 후보가 지난 23일 대선 2차 티브이(TV) 토론회에서 호텔경제학 논란을 반박하려고 거론한 “한국은행이 작성한 그림과 표”는 이와는 초점이 다른 얘기다. 이는 지난해 12월 발간된 ‘한국은행과 지급결제제도’ 책자의 8∼9쪽에 담긴 ‘5만원으로 어느 마을 구하는 법’ 일화다. 한 여행객이 모텔에 낸 5만원으로 마을 사람들이 서로의 빚을 갚고, 여행객은 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그 돈을 돌려받은 뒤 마을을 떠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는 ‘정부 재정 지출의 필요성’보다는 중앙은행이 찍어내는 화폐의 빚 청산 기능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예컨대 은행들은 고객의 자금 이체 내역을 모아뒀다가 매일 아침 11시 한국은행 금융망에 모여서 서로의 빚을 정리한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이처럼 매일 한곳에 모이기가 불가능한 만큼, 중앙은행이 가치를 보증하는 종이쪽지인 지폐를 각자의 채권·채무 관계를 정리하는 수단으로 쓸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목적으로 든 사례라는 얘기다.
이른바 호텔경제학 논란은 복잡한 경제 현상을 단순화하려는 비유를 각 진영이 ‘제 논에 물 대기’ 식으로 해석하며 답 없는 정치 공방으로 번진 사례다. 한국의 내수 소비와 투자 부진 등 돈이 제대로 돌지 않는 ‘돈맥경화’의 문제점과 자원 순환의 필요성엔 전문가들도 반박의 여지가 없는 까닭이다. 이 과정에서 정작 우리 경제에 필요한 해법과 정책 공약 논의는 사라졌다. 이름을 밝히길 꺼린 한 경제 평론가는 “경기가 어려울 때 정부와 중앙은행이 돈을 풀고, 활황일 때는 반대로 줄여야 한다는 건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일반적인 얘기”라며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이렇게 논쟁을 벌여야 할 엄청난 내용인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박종오 기자 pjo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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