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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언니’에서 인애(이시영 분)는 동생이 선물한 빨간 원피스와 하이힐을 착용하고 ‘응징’에 나선다. 그러나 이 의상 선택은 경호원으로서의 전문성을 의심하게 하는 나쁜 선택이었다. |
국내에서 액션영화의 주연을 맡을 만한 여성 배우로 누가 떠오르는가? 여성이 주연을 맡을 기회조차 흔치 않은데 장르도 로맨스나 코미디가 아닌 액션으로 한정하면 후보가 대폭 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영화 ‘언니’의 주연배우가 이시영이라는 소식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려진 대로 그는 아마추어 복싱 대회에서 입상한 경력이 있고 ‘진짜 사나이’ 등의 예능 프로그램에서 체력, 운동능력, 판단력까지 갖춘 잘 훈련된 요원처럼 활약했다. 굳이 ‘여자 마동석’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필요도 없었다.
‘성별 반전’만으로는 새로울 수 없다
‘언니’의 주인공 인애는 특공무술에 능한 실력 있는 경호원이었으나 칼을 든 테러범을 진압하다가 과잉 경호 논란에 휘말리면서 1년6개월간 복역한다. 그사이 지적장애인인 동생 은혜는 학교폭력과 성범죄의 표적이 됐고, 인애가 출소한 다음날 은혜는 사라진다. 동생을 찾아나선 인애는 은혜를 착취한 범죄자들, 그리고 그보다 더 큰 범죄집단과 마주한다.
‘언니’는 게으르다 싶을 정도로 흥행 영화의 서사를 답습한다. 알려진 대로 ‘아저씨’는 인신매매 조직에 납치된 딸을 구하는 ‘테이큰’의 설정을 그대로 가져와 흥행에 성공했다. ‘언니’는 ‘아저씨’의 여성 버전으로 흥행작을 복제한 영화를 한 번 더 복제했다. 영화를 개봉한 2019년엔 여성 주연의 액션영화가 귀했다. 이시영의 액션만 잘 살아도 진부한 설정은 못 본 체하며 웬만큼 즐길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기대는 여러 가지 이유로 빗나갔는데 가장 큰 문제는 리얼함에 관한 오인이다. 언젠가부터 액션영화는 범죄집단의 잔인하고 끔찍한 수법과 사건 현장을 경쟁적으로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테이큰'의 인신매매, ‘아저씨’의 장기밀매 같은 초강력 범죄도 실제 사건을 모티프로 해서 거침없이 재현한다. 범죄가 극악무도할수록 주인공과 관객의 분노가 커진다는 점에 착안해, 주인공이 실전 같은 액션으로 범죄자를 응징해 쾌감을 극대화하는 연출이 공식처럼 굳어진 것이다.
‘언니’ 역시 빈약한 서사를 견인하고 인애의 분노에 당위성을 더하고자 범죄 묘사에 치중하는데, 이 과정에서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만다. 은혜가 성폭력으로 고통받는 장면을 반복해서 보여주고 수위를 점층적으로 높인 것이다. 여성의 피해를 소비하고 상품화하는 잘못을 범했고 선정적이고 악의적인 연출이 거듭되면서 관객은 불쾌해졌다. 이는 ‘언니’가 작품성과 흥행에서 모두 실패한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한다. 그런데도 ‘언니'의 액션을 분석하는 이유는, 여성 주연의 액션영화가 성별 반전 하나만으로 새로울 수 없으며 여성주의적 통찰 없이는 완성하기 어렵다는 점을 ‘언니’를 통해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짓수 기술에 찬물 끼얹는 하이힐
그 와중에도 이시영의 액션은 영화의 유일한 미덕으로 꼽혔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영화의 완성도를 위해 주짓수와 카체이싱(자동차 추격전)을 배웠고 근육을 만들어 액션을 대역 없이 소화하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내가 ‘언니’의 개봉일인 2019년 1월1일부터 상영관에 간 건 순전히 주짓수 때문이었다. 이시영이 주짓수의 어떤 기술을 어떻게 소화할지 너무나 궁금했다.
그는 분명 최선을 다했다. 특기인 복싱과 주짓수의 상반된 움직임을 훌륭하게 소화했다. 그러나 배우의 고군분투에도 ‘액션은 나쁘지 않다’는 평가에 동의하기 어렵다. 액션은 싸우는 동작을 보여주는 게 전부가 아니다. 영화의 주제를 구현하는 중요한 장치이며 감정이 응축된 서사의 일부인데 ‘언니’의 액션은 이시영이라는 준비된 배우가 선보인 퍼포먼스에 그쳤다.
이쯤에서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언급하는 빨간색 원피스와 하이힐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의상은 단순히 ‘촌스럽다’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한다’는 문제를 넘어 ‘언니’에 관한 모든 걸 말해주는 상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빨간색 원피스와 하이힐은 동생 은혜가 언니에게 선물한 것으로 동생의 사랑을 의미한다. 인애는 동생을 찾아 학교에 갈 때부터 이 옷을 입었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같은 옷을 전투복 삼아 싸움을 이어간다. 그런데 영화 속 의상은 팔을 위로 뻗기에도 쉽지 않을 불편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이 옷을 입고 격렬하게 움직였다가는 원피스를 여미는 단추가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원단은 내구성이 없다시피 하다. 여성의 옷에 관한 지식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인애가 유능한 경호원이긴 한 건지, 진지하게 동생을 구하고 싶은지 의심스럽기까지 한 의상은 피했어야 한다는 얘기다.
원피스와 하이힐은 회심의 주짓수 기술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도 찬물을 끼얹는다. ‘언니’의 액션은 근접 싸움에서 관절을 꺾는 다양한 유술기(주짓수의 원류이기도 한 일본 전통 무술 유술의 주요 기술을 뜻하는데 관절꺾기, 조르기, 던지기를 포함한다)를 많이 활용했다. 특히 암바와 함께 주짓수의 가장 핵심적이고 상징적인 기술인 ‘트라이앵글 초크’가 등장한다.
이 기술은 이름 그대로 다리로 삼각형 모양의 구조를 만들어서 상대의 경동맥을 조르는 것이다. 주짓수에는 수많은 조르기 기술이 있지만 실제 연습 중에 기절하는 걸 목격한 건 트라이앵글 초크가 유일했을 정도로 이 기술은 강력하다. 우리 몸에서 가장 큰 관절인 다리 관절을 이용해 반대로 우리 몸에서 가장 취약한 부위를 공격하는 기술이기 때문에, 영화에서처럼 체구가 작은 여성이 이 기술로 남성을 제압하는 게 과장은 아니다. 실제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자기방어 수업에서도 트라이앵글 초크를 비중 있게 다룬다.
준비된 배우가 혼자 겉돌아 서글픈
그러나 트라이앵글 초크를 훌륭하게 해내는 이시영을 보며 반갑고 기뻤던 것도 잠시. 치마를 입은 탓에 배우의 허벅지가 드러났고 하필이면 다리로 목을 조르는 중에 범죄자의 자백을 받으면서 같은 자세를 몇 분간 유지한다. 그때의 연출은 너무나 의도적이고 선정적이다. 결과적으로 원피스와 하이힐은 감정적 장치로 위장된 시각적 도구였다. 이로써 ‘언니’의 액션도 포장만 새로운 스타일의 여성 액션일 뿐 진짜 의도는 ‘폭력적이면서 섹시한 여성을 보여주기’임을 알아차리기란 어렵지 않다. 영화 ‘언니’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여성 주연의 액션영화, 제발 이렇게 만들지 말라’는 반면교사의 역할을 맡고 있다. 준비된 배우가 혼자서 겉도는 모습이 마냥 서글펐다.
양민영 주짓떼라·‘운동하는 여자’ 저자
제목 : 자기방어 기술
-‘언니’의 관절꺾기
‘언니’에서 인애는 러닝타임 내내 범죄자들의 관절을 꺾는다. 특히 손가락과 손목을 망가뜨리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한다. 영화가 인애의 감정을 섬세하게 쌓지 못하고 단선적인 분노에만 치중하는 것을 고려하면 응징은 다소 싱겁게 느껴진다. 최종 빌런(악당)을 만나서도 얼굴에다 주먹을 몇 번 내리꽂는 게 고작이다. 그렇지만 실제 관절꺾기는 여성에게 특화된 자기방어 기술로 유용하다. 새끼손가락 같은 작은 관절을 원래 움직이는 방향과 반대로 꺾는 기술은 힘이 많이 들거나 어렵지 않다. 그에 비하면 큰 고통을 유발하므로 매우 효율적인 자기방어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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