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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로 잠꼬대하는 야스민을 위하여 [6411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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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로 잠꼬대하는 야스민을 위하여 [6411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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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출신 난민이자 이주노동자인 필자 도하(가명)씨의 딸은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다. 필자 제공

이집트 출신 난민이자 이주노동자인 필자 도하(가명)씨의 딸은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다. 필자 제공



도하(가명) | 이집트 출신 이주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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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딸은 자기가 한국어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딸의 친구들은 대부분 한국인이다. 카메룬 출신 단짝과도 한국어로 대화한다. 딸에게 아랍어 유튜브 영상들을 보면 어떻겠냐고 여러차례 설득했지만, 딸은 꿈에서도 한국말을 한다. 한식을 잘 먹고 한국사 속 일제강점기 이야기에 분노한다.



한국 사람의 영혼과 이집트 사람의 외모를 가진 아이. 우리 딸, 야스민(가명)이다. 나는 야스민의 아빠이자 6년차 대한민국 이주민이고, 공교롭게도 우리 가족의 성은 아랍어로 ‘이방인’이다.



나는 왜 글을 쓰나? 글쓰기 자체의 즐거움 때문에 쓴다. 글쓰기는 정신과에서 추천하는 치료법이기도 하다. 나는 글쓰기에 평화를 이루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모든 계층과 집단이 제 고통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상 평화란 불가능할 테니까. 특히 이주민처럼, 가장 취약하고 소외된 이들의 자기 서사의 힘을 나는 믿는다.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이주민들 곁에서 그 아이들도 건강하게 자라나리라.



그러므로 이 글은 우리 딸을 위한 이야기다. ‘이방인’이라는 성을 가지고 이주민 가정에서, 한국인이거나 한국인이 아닌 친구들과 한국어로 꿈꾸며 자라는 야스민을 생각하며 쓴다.



7년 전인 2018년 7월, 나는 아내와 딸과 함께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무더운 여름이었을 텐데 우리는 어쩐지 추웠다. 이상한 추위 때문이었다. 당시 두살배기 딸이 아파서 기내용 담요를 가지고 내릴 수 있을지 물었다. 부탁에 응하던 승무원의 미소는 긴 여정의 피로와 딸에 관한 걱정을 한숨 덜어주었다. 공항 직원은 어린 딸을 보고 우리가 대기 없이 입국 심사를 받을 수 있게 해주었다. 그의 친절은 우리가 난민 신청을 하러 왔다고 하자 싸늘해졌다. 우리는 한주 내리 난민 신청 서류 검토를 기다리며 볕이 들지 않는 공항 안에 붙들려 있었다. 먹을 것과 잘 곳이 주어졌지만, 공항을 떠나기 전 사람의 미소를 다시 한번 볼 수 있을까 싶었다.



이후 우리는 석달간 출입국·외국인지원센터(난민지원센터)에서 지냈다. 나는 아내와 딸을 일주일 또는 격주에 한번밖에 만날 수 없었다. 센터의 숙식이 양호했을지언정 공무원들을 마주할 때의 압박감은 어쩔 수 없었다. 아내도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이들에 대한 우리의 느낌과 판단이 얼마나 정당한지 확언하기는 어렵지만, 제삼자가 센터를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난민들의 의견을 청취했다면 그 두려움이 덜했으리라는 건 확실하다.



난민 신청 뒤 여섯달은 합법적으로 노동할 수 없다. 그러나 그 후에도 외국인으로서 일하기는 녹록지 않았다. 우선 브로커(중개인)를 통해 일자리를 구해야 했고, 그렇게 한다 해도 쉽지 않은 일 투성이였다. 가령 어느 날 브로커는 돼지고기를 먹어야 채용한다고 전했고, 아내한테도 일하려면 히잡을 쓰지 말라고 했다. 나는 난민 신청자 비자로 체류하고 있다는 이유로 해고당했고 여러 채용에서 거부당했다. 2020년 중반까지도 나는 돈을 버느라 가족과 떨어져 지냈다. 당시 내게 금요일과 토요일 저녁은 신혼 밤 같았다. 사랑하는 아내와 딸 곁에 있을 수 있는 드문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 기쁨은 일요일 저녁이 되면 상실감으로 바뀌었고, 나는 다시 일하러 떠났다.



심하면 하루에 열두시간 넘게 일했다. 한국어를 공부할 틈을 내기란 불가능했다. 지금은 하루 근무가 여덟시간을 넘지는 않는 곳에서 일하지만, 이 역시 그냥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가령, 근로계약서를 작성한 지 하루 반 만에 나는 너무 느리게 일한다며 사직서를 제출하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한국인 친구들이 한국 법상 노동자의 권리를 설명해주었다. 믿음직한 이 친구들이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하지만 한국 정부는 나 같은 이들을 도와줄 공적 창구인 외국인노동자지원센터 예산을 2024년도에 전액 삭감했다.



지난해 12월3일,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에서 느낀 당혹감은 국회로 향하는 군인들의 모습 앞에서 충격, 공포, 악몽 따위로 번졌다. 나는 다음날도 일해야 했기에 잠을 청했지만, 아침에 계엄 해제 소식을 접하고 환희와 긍지로 벅차올랐다. 그 밤 국회로 향했던 모든 사람에게 감사와 존경의 인사를 보낸다. 이들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켜냄으로써 이주민과 난민을 비롯해 가장 취약한 이들도 지켰다. 내게 한국 사람들이란 사면을 감싸는 산줄기 같다. 어떤 폭풍과 바람과 눈비를 맞닥뜨리건 그들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전보다도 더 울창하고 푸르게 돌아온다.



번역 현정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삶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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