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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게티이미지뱅크. |
인지 저하증(치매)을 앓는 어머니는 매일 오후 4시가 되면 집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아들은 어머니의 외출을 필사적으로 막고, 어머니는 절규하며 폭력을 휘두르는 날들이 이어졌다. 아들은 경험 많은 요양보호사에게 상담을 청했고, 요양보호사는 어머니의 오빠에게 연락해 ‘오후 4시’에 얽힌 사연을 물어보았다. 어머니의 오빠는 오후 4시가 아들이 어렸을 때 유치원 버스에서 내리던 시간이었을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요양보호사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어머니의 외출과 배회를 멈출 수 있었다. “오늘은 아드님이 유치원에서 하룻밤 자는 행사가 있어서 안 올 거예요. 버스도 오늘은 안 와요.”
일본의 문화연구자 지카우치 유타의 ‘우리는 왜 선물을 줄 때 기쁨을 느끼는가’에 소개된 이 이야기는 다른 일본인 저술가의 책에 나오는 실화라고 한다. 지카우치의 책에서 이 일화는 증여의 속성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제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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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선물을 줄 때 기쁨을 느끼는가 l 지카우치 유타 지음, 김영현 옮김, 다다서재, 1만8000원 |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1925)에서 증여는 자본주의 체제의 사적 소유 및 이익 중시와 달리 조건 없는 베풂과 공적 향유로 공동체의 유대를 강화하는 관습 및 제도로 소개된다. 증여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교환을 들 수 있는데, 교환은 경제적으로 동등한 가치를 지니는 물건을 주고받는 행위를 가리킨다. 교환의 핵심에는 경제적 가치라는 자본주의적 합리성이 자리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증여에는 모종의 불합리성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인지 저하증 어머니의 ‘오후 4시’는 어떻게 증여가 되는가. 아들을 외롭게 둘 수 없다는 자신만의 이야기 속에서 어머니의 행동은 증여가 된다. 지카우치는 이런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배경으로 진화론적
설명을 곁들인다. 인간은 직립 보행을 택하면서 골반이 좁아졌고 그 때문에 아이는 뇌와 몸이 덜 자란 상태로 산도를 통과해 세상에 나와야 했다. 신생아의 인지적·신체적 능력 결핍을 보완한 것이 부모의 아낌 없는 보살핌이라는 사회적 능력이었다. 그러니까 “인류의 여명기부터 ‘타인에게 받는 증여’와 ‘타인에게 주는 증여’를 전제로 살아가는 것이 운명처럼 정해졌다”는 것이다. 부모-자식 사이만이 아니라 “인간적인 관계란 본질적으로 증여적인 관계”이며 “우리는 모르는 사이에 증여를 통해 타인과 연결되고 있”다고 지은이는 덧붙인다.
물론 증여에도 부정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 “증여는 때때로 나의 자유, 혹은 누군가의 자유를 빼앗”기도 한다. 가령 내 쪽에서 바라지도 않았는데 일방적으로 연하장을 보낸 누군가가 있다고 치자. 그 연하장에 답을 하자니 둘 사이에 연하장을 주고받는 관계가 고착될 것 같아 망설여지고, 답을 하지 않자니 무례하다는 평을 들을까 봐 신경이 쓰인다. “받는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부채 의식을 안긴다”는 점에서 이런 증여는 폭력적이다. 심지어는 자식을 향한 부모의 증여조차 자식으로 하여금 ‘착한 아이’가 되고자 노력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늘을 거느리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일까. “증여는, 그것이 증여라고 알려져서는 안 된다” 게 핵심이다. ‘오후 4시’의 어머니의 경우에도 아들은 요양보호사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뒤늦게, 어머니가 발신한 증여를 알아차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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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날을 맞아 딸이 아버지에게 깜짝 선물을 하며 기뻐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
학부에서 과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한 지은이는 과학과 철학, 문학작품 등 다양한 분야를 오가며 증여에 관한 논지를 펼친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언어게임 이론,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 토머스 쿤의 발산적 사고와 수렴적 사고, 소설 주인공인 탐정 셜록 홈스, 일본의 에스에프 작가 고마쓰 사쿄의 소설들, 카뮈의 ‘시지프 신화’ 등을 종횡하는 논의는 통섭의 귀감이라 할 법하다.
‘오후 4시’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는 또 다른 중요한 진실이 있다. 증여는 수취인이 발견하는 순간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 대목에서 지은이는 야마자키 마리의 만화 ‘테르마이 로마이’를 예로 들어 설명을 이어 간다. 이 만화의 주인공인 고대 로마의 목욕탕 설계사 루시우스는 어째서인지 목욕탕에 몸을 담그면 현대 일본의 목욕탕으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된다. 그렇게 도착한 일본의 다양한 목욕 시설에서 그는 온갖 현대 문물을 보며 감탄을 거듭하는데, 그가 감탄하는 대상이 바로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받고 있었던 증여”라는 것이 지은이의 설명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흔하고 당연해서 특별히 눈에 들어오지도 못하는 평범한 것들이 사실은 옛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준비해 놓은 선물이고, 우리는 야마자키의 만화를 보면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에스에프 작가 고마쓰 사쿄의 단편 ‘날이 밝으면’이나 장편 ‘부활의 날’은 당연해 보였던 일상이 흔들리고 파괴되는 상황을 통해 거꾸로 일상의 고마움과 소중함을 알게 한다(그러니까, 뒤늦게 증여에 눈을 뜨게 한다). 그렇게 흔들리고 부서질 수도 있는 일상의 평화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켜주는 이들이 ‘이름 없는 영웅’(unsung hero)이다. “그런 영웅은 즉, 평가받을 일도 칭찬받을 일도 없이 남모르게 사회의 재앙을 없애는 사람을 가리킨다.” 증여의 실체와 이름 없는 영웅의 존재를 깨달은 이는 “그 답례로 스스로가 우리 사회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떠받치는 또 다른 주체가 될 수 있다.” 증여의 순환으로 시장경제의 ‘빈틈’을 메꾸자는 책의 주제가 이로부터 도출된다.
책의 결론부에 해당하는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것은 지은이가 증여와 교환의 공존과 융합을 강조한다는 사실이다. 증여는 시장경제를 부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시장경제를 필요로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비록 증여의 존재와 가치를 부각시키기 위한 반대항으로서 시장경제의 등가교환을 말하고 있긴 하지만, 이 지점에서 그의 논의는 모스의 ‘증여론’에서 크게 벗어나는 듯하다. 그가 심지어는 “사업 현장에서도 증여의 이론과 원리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며 “건전한 자본주의, 따뜻한 자본주의”를 예찬할 때, 증여의 원리에 입각한 더 급진적인 변화를 꿈꾸었던 독자들은 적잖이 실망할 수도 있겠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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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시장경제라는 교환의 논리의 한복판에서 증여를 성립시키기 위해 산타클로스를 발명했다.” 게티이미지뱅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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