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성인 음악평론가·풍월당 이사 |
그러나 남국에서 멀리 떨어진 동토의 청년 작곡가는 비제의 아름다운 선율이 죽음을 마주하고 있음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소련의 모차르트로 불렸던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사진)가 언제 숙청당할지 모르는 처지에 빠진 것도 그가 겁 없이 그려낸 ‘사랑의 자유’ 때문이었던 것이다. 레스코프 원작의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은 여성에 대한 이중잣대, 전근대적인 관습으로 인해 권태를 해소할 길이 없는 여인 카테리나의 고삐 풀린 사랑과 잔혹한 살인을 다룬다.
그러나 스탈린에게는 그 오페라가 막다른 곳에 처한 불행한 영혼의 아우성을 말하고 있음을 알아볼 소양이나 감수성이 없었다. 그는 불길한 뒤끝을 남기며 공연 도중에 퇴장했고, 곧 당 기관지 프라우다에 ‘음악이 아니라 혼란’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그로부터 1년, 쇼스타코비치는 목숨을 걸고 교향곡 5번을 썼다. 당국이 바라는 대로 긍정적인 결말이 있는 승리의 찬가를 바친 것 같았다. 그러나 숨겨 두었다. 1악장 두 번째 주제에다 저 카르멘의 노래를 숨겼다. 플루트가 노래하고 호른이 응답하는 천진하고 다정한 선율은 ‘하바네라’의 그 소절과 닮았다. ‘사랑, 사랑.’ 무너지지 않기 위해 청년은 사랑을 말했다. 당국은 모르게 잘 숨겨서, 귀와 가슴이 살아있는 자만 알아듣도록. 그것이 ‘당국의 정당한 비판에 대한 소비에트 예술가의 창의적인 답변’이었다.
나성인 음악평론가·풍월당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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