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검색
헤럴드경제 언론사 이미지

트럼프가 대놓고 추궁한 ‘백인 집단학살’…남아공 어떻길래[디브리핑]

헤럴드경제 김영철
원문보기

트럼프가 대놓고 추궁한 ‘백인 집단학살’…남아공 어떻길래[디브리핑]

서울흐림 / 22.2 °
디브리핑(Debriefing:임무수행 보고): 헤럴드경제 국제부가 ‘핫한’ 글로벌 이슈의 숨은 이야기를 ‘속시원히’ 정리해드립니다. 디브리핑은 독자와 소통을 추구합니다. 궁금한 내용 댓글로 남겨주세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워싱턴 D.C. 백악관 집무실에서 시릴 라마포사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 대통령에게 백인 농부 집단 학살과 관련된 내용가 담긴 서류들을 보여주고 있다. [로이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워싱턴 D.C. 백악관 집무실에서 시릴 라마포사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 대통령에게 백인 농부 집단 학살과 관련된 내용가 담긴 서류들을 보여주고 있다. [로이터]



일반적으로 (집단 살해 피해를 보는 사람은) 백인 농부들이다.21일 미국 백악관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
[헤럴드경제=김영철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시릴 라마포사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 대통령에게 공개적으로 면박을 줬다. 통상적으로 양 정상의 환담을 취재진에 짧게 공개하는 정상회담에서 남아공의 ‘백인 농부 집단살해’ 의혹을 공개적으로 제기하면서 라마포사 대통령에게 굴욕을 안긴 것이다.

전 세계가 주목한 이날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이 기습 공격에 가까운 공개 추궁을 하면서 남아공 사회에 만연한 흑백 인종차별 문제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아프리카너는 누구?
지난 2023년 12월 남아프리카공화국 오라니아에서 수백명의 ‘아프리카너(Africaner)’들이 행사에 참여한 모습. [게티이미지]

지난 2023년 12월 남아프리카공화국 오라니아에서 수백명의 ‘아프리카너(Africaner)’들이 행사에 참여한 모습. [게티이미지]



이날 트럼프 대통령이 남아공에서 대량 학살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고 주장한 ‘아프리카너(Africaner)’는 16세기 이후 네덜란드 등 유럽에서 남아공으로 이주해 정착한 백인 집단을 일컫는다.

영국 BBC 방송에 따르면 현재 아프리카너 인구는 약 250만명으로, 남아공 전체 인구 6000만명 중 약 4%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네덜란드계(34.8%), 독일계(33.7%), 프랑스계(13.2%)로 구성돼 있으며, 이들이 구사하는 아프리칸스어는 네덜란드어와 매우 유사하다.


지난 1950년대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에서 인종차별 정책을 펼쳐온 헨드릭 페르부어르트 남아공 총리. [게티이미지]

지난 1950년대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에서 인종차별 정책을 펼쳐온 헨드릭 페르부어르트 남아공 총리. [게티이미지]



남아공 역사에서 아프리카너는 정착 과정에서 토착민들의 땅을 강제로 빼앗았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특히 아프리카너들이 남아공 정부를 장악했던 지난 1948년에는 ‘아파르트헤이트(흑백 분리 정책)’가 시작되면서 인종차별을 제도를 통해 극단으로 몰아간 바 있다.

아파르트헤이트가 시행되면서 인종 간 결혼이 금지되고, 기술 및 기능직 대부분을 백인으로 구성할 수 있도록 제한을 뒀다. 뿐만 아니라 흑인들을 타운십(흑인 집단거주지)과 8개 흑인 독립 보호구역인 홈랜드로 강제 이주시키면서 인종차별을 노골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교육에서조차도 흑인들에겐 열악한 교육만 받도록 해 차별을 뒀다.


남아공 지도자조차 인종 차별에 앞장섰다. 1950년대 남아공 총리였던 헨드릭 페르부어르트는 “흑인들은 결코 더 나은 교육의 가능성을 보여선 안 된다”며 “그들의 역할은 나무를 베고 물을 긷는 것”라고 노골적인 인종차별 발언을 일삼았다.

50년 가까이 인종 차별의 토대로 활용된 아파르트헤이트는 지난 1994년 남아공 최초의 전 국민 참정 선거를 통해 당선된 넬슨 만델라와 아프리카민족회의(ANC)가 정권을 잡고나서야 종지부를 찍었다. 해당 정책이 폐기된 것을 기점으로 만델라 정권은 인종 간의 화합을 이루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시행하는데 앞장섰다.

트럼프 “흑인들이 백인 집단학살”…“왜곡된 허위 사실”

남아공의 급진 좌파 정당 경제자유전사(EFF)의 줄리어스 말레마 대표가 투쟁가 ‘보어인(네덜란드계 남아공인)을 쏴라’를 부르는 모습. [유튜브 갈무리]

남아공의 급진 좌파 정당 경제자유전사(EFF)의 줄리어스 말레마 대표가 투쟁가 ‘보어인(네덜란드계 남아공인)을 쏴라’를 부르는 모습. [유튜브 갈무리]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대형 TV를 집무실이 있는 백악관 서관(웨스트윙)으로 갖고 와 백인 농부 학살 의혹과 관련된 영상을 틀고, 라마포사 대통령에게 백인 희생자 관련 기사를 출력한 종이 뭉치를 건네는 등 남아공 내 백인 인종차별을 문제 삼았다.

트럼프가 이날 공개한 영상처럼, 남아공의 급진 좌파 정당 경제자유전사(EFF)의 줄리어스 말레마 대표는 지난 2010년 각종 집회에서 투쟁가 ‘보어인(네덜란드계 남아공인)을 쏴라’를 불러 인종차별 간 갈등을 조장했다.

하지만 남아공 내 어느 정당이나 법률 기관도 백인 집단학살을 사실로 규정하지 않고 있다. BBC는 이 같은 ‘백인 집단학살설’이 극우 성향의 집단들 사이에서 확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남아공 정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10월부터 12월까지 발생한 살인 사건으로 6953명이 사망한 가운데 12명은 농장에서 사망했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1명은 농부였고, 5명은 농장 거주민, 4명은 직원이었는데 이들 모두 흑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BBC는 전했다.

지난해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에서 백인 소유 농장에 버려진 음식물을 구하러 들어간 흑인 여성 2명이 농장주와 직원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한 가운데 사건에 가담한 농장주와 직원들이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AP]

지난해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에서 백인 소유 농장에 버려진 음식물을 구하러 들어간 흑인 여성 2명이 농장주와 직원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한 가운데 사건에 가담한 농장주와 직원들이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AP]



남아공 법원 역시 지난 2월 백인 대량 학살에 대해 “명백한 상상이며 현실이 아니다”고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백인들을 집단 학살했다는 주장과는 반대로 흑인들이 백인들에 의해 사망한 사건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지난 2016년에는 흑인 노동자 2명이 체불임금을 받기 위해 백인 고용주를 찾아갔다가 고용주의 아들을 포함한 백인 4명에게 폭행을 당해 사망한 일이 일어났다. 사건 발생과정에서 백인 경찰 역시 가담한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해에는 백인 소유 농장에 버려진 음식물을 구하러 들어간 흑인 여성 2명이 농장주와 직원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이에 대해 BBC는 “백인 집단학살은 상당 부분 확증 편향돼 온라인상에서 허위사실로 퍼지고 있다”고 전했다.

“남아공 백인 7%가 상위 경영직 절반 이상 차지”...기울어진 운동장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의 급진 좌파 정당 경제자유전사(EFF)의 지지자들이 지난 2일  프리토리아에서 아프리카너 전용 클라인폰테인 정착촌으로 행진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의 급진 좌파 정당 경제자유전사(EFF)의 지지자들이 지난 2일 프리토리아에서 아프리카너 전용 클라인폰테인 정착촌으로 행진하고 있다. [게티이미지]



수년간 인종 차별을 근절하려는 시도에도 남아공에서 백인 공동체의 평균 생활수준은 흑인보다 현저히 높은 상태다. 극도로 벌어진 부의 격차로 인해 인종 간 갈등이 심화된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남아공 고용 형평성 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남아공 내 경제활동인구에서 백인들은 7.7%에 불과하지만, 상위 경영직에선 이들이 절반 이상인 62.1%를 차지하고 있다. 로이터가 인용한 국제학술지 정치경제학리뷰에서도 백인들은 남아공 사유지의 4분의 3가량을 소유하고 있으며, 흑인 다수보다 약 20배에 달하는 부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남아공 정부는 ‘경제적 역량 강화’와 ‘고용 형평성’ 법안을 통해 기업들이 비(非)백인 고용 인원을 늘리기 위한 필수 고용 목표치를 설정하는 등 인종간 경제적 불균형을 줄이는 정책을 펴왔다.

하지만 이 같은 법안들도 일부 소수 인종 집단에선 역차별 우려가 제기됐다. 법안들로 인해 정부 계약이나 일자리 확보가 더 어려워졌다는 불만부터 부정 부패 가능성에 대한 비판도 나왔다. 심지어 남아공 연정 민주동맹(DA)은 “고용 형평성 개정안은 더 많은 사람들을 남아공 경제에서 소외된 존재로 만들 것”이라며 최근 헌법 소원을 제기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