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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톡] 100조 약속만으론 어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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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톡] 100조 약속만으론 어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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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에이전트 시대, AGI 전 과도기
기술 영향력 불확실성 커지는데
숫자 앞세운 단순 공약은 공허해

편집자주

과학 연구나 과학계 이슈의 의미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일들을 과학의 눈으로 분석하는 칼럼 ‘사이언스 톡’이 3주에 한 번씩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가 19일(현지시간)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개발자 콘퍼런스 '마이크로소프트 빌드 2025'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그는 AI 에이전트가 개인과 조직을 포함한 비즈니스 전반에 작동하는 인터넷 환경을 '오픈 에이전틱 웹'이라고 정의했다. 마이크로소프트 제공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가 19일(현지시간)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개발자 콘퍼런스 '마이크로소프트 빌드 2025'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그는 AI 에이전트가 개인과 조직을 포함한 비즈니스 전반에 작동하는 인터넷 환경을 '오픈 에이전틱 웹'이라고 정의했다. 마이크로소프트 제공


최근 만난 한 공대 교수는 미국인들이 과거 세탁기가 보급된 이후에도 세탁에 들이는 노동시간을 크게 줄이지 못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고 했다. 힘든 세탁을 기계가 대신해주니 여가 시간이 늘 거라는 당시 예측은 빗나갔고, 세탁기가 있으니 세탁을 더 자주 하게 됐다는 것이다. 신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늘 예상대로 흘러가진 않는다.

미국에서 개인용 컴퓨터(PC) 보급이 확산되던 1970, 80년대에도 그랬다고 한다. 생산성이 크게 향상될 거라고 기대한 기업들이 많은 PC를 사들였는데, 생산성은 정체됐다. 생산성이 늘기 시작한 건 1990년대 중반 들어서였다. 기술에 익숙해지고 조직을 적응시키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인공지능(AI) 에이전트가 줄줄이 등장하고 있다. 빅테크들은 만능 AI 에이전트 개발 경쟁에 열을 올리는 중이고, 사람 없이 AI 에이전트끼리 협업하는 ‘에이전트 투 에이전트(A2A)’ 시대가 머지않았다는 전망이 나온다. 노벨상을 받은 데미스 허사비스 구글딥마인드 최고경영자가 5~10년 뒤면 일반인공지능(AGI)이 나온다 했다는데, 벌써 과도기에 들어선 건지도 모르겠다.

세탁기나 PC 전례에 비춰보면, AI 에이전트 기술 자체가 뛰어나다 해도 현실 세계에서 언제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는 누구도 정확히 예측하기 어렵다. 여러 AI 에이전트의 작업을 효율적으로 조율하는 AI 오케스트레이션 기법을 개발하고, 인간과 AI의 최적 업무 분담 비율을 도출하려는 테크업계의 시도는 다가올 변화를 최대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가기 위한 시도일 것이다.

AI가 몰고올 변화는 세탁기나 PC가 가져온 변화와 비견하기 어려울 만큼 클 거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AI가 자기들이 생성한 데이터를 서로 학습하는 상황이 반복되면 왜곡된 결과물을 만들고, 결국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는 ‘모델 붕괴(model collapse)’ 현상이 최근 입증됐다. 아직까진 그런 가능성이 온라인에 제한적으로 존재하지만, A2A 시대엔 일상에서 맞닥뜨리게 될지 모른다.

AI 에이전트에 핵심 업무를 계속 일임하다 보면, PC는 AI의 단말기 정도로 위상이 낮아지고 인간의 역량 중 일부분은 자연스럽게 도태될 거란 예상이 적지 않다. ‘탈숙련(deskill)’이라 불리는 이런 현상을 경계하고, 핵심 역량으로 ‘보존’해야 할 인간의 능력이 어떤 것들인지 논의해야 한다는 게 요즘 과학철학계의 중요한 화두다. AI는 이미 기술을 넘어 철학 영역에 들어와 있다.


빅테크들은 AI 에이전트의 표준규약을 만들어 자기들끼리 공유하기 시작했다. AI 에이전트가 개인부터 조직, 사업의 시작부터 끝까지 적용되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공언한다. 테크기업이 기술 주체 역할을 넘어 미래산업과 국가안보 전략의 설계자로 무섭게 힘을 키워가고 있다. AGI 보유국이 핵 보유국과 맞먹는 지위를 갖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오는 마당이니, AI의 영향력이 어떻게 흘러갈지 예측은 갈수록 더 어려워 보인다.

학계도 업계도 애가 타는데, 대선 후보들이 꺼내든 AI 공약은 공허하다. 빅테크 데이터센터 하나 유치 못 하면서 AI 고속도로를 만든다 하고, 엔비디아는 별 말 없는데 그래픽처리장치(GPU) 5만 장을 들여오겠다 하고, 돈 나올 데가 어딘지 100조 원 펀드를 조성하겠다 한다. 당장 선거판에선 이런 단순한 약속이 통할지 몰라도, 집권 이후엔 어림없다. 불확실성이 오히려 기회일 수 있다. 세계 AI 시장에서 우리나라의 존재감을 키울 묘책부터 설계해야 한다.

임소형 미래기술탐사부장 precare@hankookilbo.com